잃어버린 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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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최서윤


1960년대 초 브라질의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발전한 보사노바가 머나먼 타지로,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문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느긋한 리듬과 직관적으로 낭만을 노래하는 가사, 가볍게 읊조리는 투의 보컬은 보사노바의 특징을 차용한 여타의 현대 음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컨대 90년대 일본의 시부야계 음악 중에서는 (물론 잡다한 장르의 영향을 받았으나) 보사노바의 낭만주의적 문법을 그대로 흡수해 일본어로 노래하는 앨범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굳이 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보사노바적’인 창법은 하나의 대명사처럼 굳어져 국가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현대까지 심심찮게 변용된다. 다른 장르들이 쇠퇴와 소생의 주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보사노바는 국내에서도 꾸준한 마니아층을 기반으로 두고 조용히 맥을 잇고 있다.

이렇게 맥이 이어지는 중에도 보사노바의 정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티스트들의 라인업은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다. 물론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와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ônio Carlos Jobim의 이름을 누락할 수는 없겠으나 여성 아티스트에 대해 언급한다면 자연스레 어떤 이름을 떠올리겠는가?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그리고? 그리고… 나라 레앙Nara Leão의 이름을 조금은 후순위로 거론할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아스트루드처럼 세계적인 히트곡을 보유하거나 엘리스처럼 특출 난 가창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스트루드 같은 담백하고 차분한 음색으로 엘리스처럼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노래하는 독특한 아티스트였다. 더불어 나라 레앙이 살았던 아틀란치카 대로(코파카바나 해변과 이파네마 해변을 잇는 도로)의 아파트에서 보사노바가 태동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녀가 자국에서 ‘보사노바의 뮤즈’로 불리곤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나라의 존재감에 비해 사후의 언급이 부족한 것은 의아하다.

그러나 정작 나라 레앙 본인은 생전 뮤즈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라는 보사노바가 대중화되며 상업적 성공을 누린 1960년대 중반 이래로 끊임없이 보사노바의 범주에서 벗어나고자 거리를 둔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나라가 여타 보사노바 아티스트들에 비해 후대에는 크게 주목받지 않게 된 의아한 현상의 배경이기도 하다. 보사노바가 브라질 자국을 넘어 미국에서 성황하기 시작한 1964년, 그녀는 브라질의 연예 잡지인 Fatos & Fotos와의 10월호 인터뷰에서 보사노바와의 전면적인 결별을 선언한다.

“보사노바는 이제 그만이에요. 두세 명의 지식인을 위해 아파트에서나 부를 그 작은 노래들도 그만하고 싶어요. 나는 순수한 삼바를 원해요. (…) 보사노바는 나를 졸리게 하고,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않아요.”

나라가 한때 자신의 주 장르였던 보사노바에 대해 넌더리를 내며 말하는 이 인터뷰는 당대 음악계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보사노바가 엘리트주의적인 장르라는 문제 의식을 공식적으로는 처음 제기한 아티스트였다. 심지어 인터뷰에서 언급하는 ‘아파트’는 보사노바 아티스트들 사이 음악적 교류가 시작된, 나라가 유년시절 성장한 리우데자네이루의 아파트를 떠오르게 한다. 나라의 문제 의식은 2025년의 보사노바 리스너들에게도 당혹감을 안기는 듯한데, 최근 레딧Reddit의 브라질 음악 커뮤니티에는 다음의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띤 글이 게시되었다: ‘보사노바가 엘리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축하합니다! 역사도 모르시네요!(If you think bossa nova is for the elite, congrats! You don't know history!)’ [링크] (현재는 작성자에 의해 본문이 삭제되었으나, 댓글은 볼 수 있다)

쿠데타가 발발하기 3일 전인 1964년 3월 발행된 Fatos & Fotos 속 나라 레앙의 인터뷰 지면.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보사노바의 떠오르는 스타로 소개되었는데, 나라는 스스로를 스타가 아닌 평범한 소녀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글은 보사노바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논쟁을 21세기 후대의 리스너들 사이에서 다시금 화두에 올렸다. 글쓴이에 동조하며 보사노바를 만든 주역들이 중산층은 맞지만 그들이 엘리트주의자는 아니라는 의견과, 애초에 백인들을 위한 삼바로서 발전되었으므로 그 근본부터 엘리트주의적이다, 또는 70년대 이래 정치적 도구로 변용되었다는 비판의 의견들이 댓글창에 뒤섞여 있다.

그런데 보사노바의 ‘엘리트성’에 관한 논쟁은 그것이 문제적으로 삼는 지점이 명확치 않다. 한 음악 장르가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식을 함의하는가? 보사노바가 그 뿌리를 엘리트 지식인들에게 두고 있다는 것인가? 보사노바를 이루는 음악적 요소가 지극히 엘리트적이어서 일반 대중과는 유리되어 있다는 것인가? 혹은 백인 중산층들에 의해 주로 소비되었기 때문에? 우선 나라 레앙도 변호사 아버지를 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기에 출신 계급에 관한 비판이라면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술할 브라질의 독재 정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아티스트 집단에는 나라를 포함해 다양한 계층 출신들이 속해 있었고, 창작자의 성장 배경이 그의 창작물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치더라도 ‘중산층이 만든 음악은 전부 엘리트주의적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더불어 레딧 글쓴이의 도발에 따르면 보사노바의 시초격 아티스트인 나라 레앙 본인도 보사노바의 역사를 모르는 문외한으로 취급받게 된다.

한편으로 기존의 거칠고 시끄러운 삼바를 외국의 백인 청중들도 듣기 좋도록 매끄러운 사운드로 벼려 낸 것에 석연찮음을 느낄 수 있으나, 보사노바는 기본적으로 삼바의 리듬과 형식을 계승하고 있기에 삼바의 전통과 완전히 분리된 것만도 아니었다. 결국 가장 문제적인 부분은 보사노바가 바다 건너 미국 중산층의 아파트에서 고상하게 즐기는 도회적 음악으로 자리잡은 것에 대한 문화적인 반감일 것이다. 음악의 계급성이 과거보다는 퇴색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한다면 보사노바가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명제를 들었을 때 선뜻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시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보사노바에 대한 반감을 피부로 느꼈던 나라 레앙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왜 나라 레앙은 보사노바와, 정확히는 그녀가 보사노바 아티스트로서 낭만을 노래하며 누렸던 자유와 결별하기로 결심했는가?


꼭 보사노바의 헤비 리스너가 아니더라도,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가 카메라를 의식하며 어색하고 수줍은 자세로 ‘The Girl From Ipanema’를 부르는 무대 영상을 유튜브에서 한 번쯤 접해보았을지 모른다. 이 무대는 당시 보사노바의 열풍에 힘입어 미국의 한 스튜디오에서 TV 송출용으로 녹화된 영상이었다. 보사노바 전성기의 상징적인 기록물로 남아 있는 이 무대는 스탄 게츠Stan Getz와 주앙 지우베르투, 그리고 당시 주앙과 부부였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가 일부 참여한 『Getz/Gilberto』가 발매 이후 미국에서 유난히 흥행하면서 기획된 자리였다. 여기서는 본래 주앙 지우베르투와 함께 부른 원곡에서 주앙의 포르투갈어 가사를 생략해 버렸다. 오로지 아스트루드가 영어로만 노래한, 미국의 청중들을 친절하고도 정확하게 겨냥한 무대였다. 보사노바의 성공은 브라질 음악계의 저변을 거대한 미국 시장으로까지 넓혔으나 정작 브라질 내부의 암울한 실정과는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1960년대 리우데자네이루 아르포아도르 해변의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과 나라 레앙

『Getz/Gilberto』의 발매 시기보다 조금 앞선 1964년 2월, 나라는 보사노바의 주역인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주앙 도나토João Donato, 호베르투 메네스칼Roberto Menescal 등과 협업한 데뷔 앨범 『Nara』를 발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라의 음악에서 정치적 운동가로서의 색채는 짙지 않았고 명백하게 보사노바 아티스트로 분류되었다. 뒤이어 3월에 『Getz/Gilberto』의 흥행으로 아스트루드가 이파네마 해변의 어느 아름다운 소녀로서 부상하며 1964년은 브라질 음악계의 황금기가 되었으나, 동시에 브라질 전역에 비극이 도래한 여러모로 역사적인 해로 변모한다. 3월 31일에 브라질의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며 기나긴 독재 정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곧 음악계에서도 자유와 저항의 가사를 담은 정치적 목소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으나, 보사노바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전혀 무관한 듯 여전히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며 성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 레앙은 그런 낭만에 안주하거나 적어도 침묵할 수 있는 체질이 아니었다. 미국의 음악 매거진 FOND/SOUND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녀는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가 아니었다’. (참고로 나라와 아스트루드는 10대 시절부터 절친이었고, 아스트루드에게 주앙을 소개시켜 주며 음악계로 입문할 수 있게 권유한 것도 나라였다. 나라의 음악적 전환을 기점으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라는 바로 그 해 11월에 전작과 달리 사회적 메시지로 가득 찬 앨범 『Opinião de Nara』를 발표한다.

Podem me prender, podem me bater / Podem até deixar-me sem comer / Que eu não mudo de opinião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도 있고, 나를 때릴 수도 있어 / 심지어 나를 굶주리게 둘 수도 있어 / 하지만 나는 내 의견을 바꾸지 않을 거야

『Opinião de Nara』의 1번 트랙인 ‘Opinião’의 도입부는 아예 위와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나라와 더불어 그녀의 데뷔 앨범에 참여한 카를루스 리라 외 여러 보사노바 아티스트들은 군부 정권에 대한 보사노바의 침묵을 비판하며 그들만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것이 훗날 보사노바와 대비되는 민중 음악 장르로서 MPB(Música Popular Brasileira)의 시작이었다. 보사노바에서 MPB의 주역으로 옮겨 간 나라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진보 성향 아티스트들과 함께 저항적 성격의 무대인 ‘Show Opinião’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녀는 거듭 보사노바와 대비하여 삼바의 근본성과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했는데, 과거 그녀와 협업했던 호베르투 메네스칼은 “나라 레앙도 ‘순수한 음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우리 모두 순수한 음악가가 되어 함께 천국에 갈 것”이라며 조롱 섞인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보사노바에 머무르는 호베르투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에게 나라의 음악적 노선 전환은 일종의 배신이었고, 보사노바 내부에서는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앞선 레딧에서의 논쟁을 환기해보면, 나라와 같은 MPB 아티스트들의 관점에서 보사노바는 중산층 백인 엘리트들이 바 혹은 라운지에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무해하고 표백된 음악으로 전락한 장르였다. 본래 보사노바가 근본을 둔 삼바와 라틴 문화권에 관련된 맥락은 사라지고 이국적인 발음으로 노래하는 소녀가 거니는 해변의 이미지만 남은 것이다. 이러한 표백 작업은 독재 정권의 정치적 감시를 견뎌 가며 저항을 했던 같은 음악계의 아티스트들에게 거부감을 안길 뿐만 아니라, 백인 청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아티스트였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에게도 장기적으로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이파네마의 어느 순수하고 매력적인 소녀’로 표상되었고 그런 그녀에게 정치적 내용이든 어떤 내용이든 간에 능동적으로 목소리를 낼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 보사노바계에서 그녀의 위치는 처음부터 철저히 수동적이었는데, 『Getz/Gilberto』 앨범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룻밤의 녹음 세션비 120달러 외에는 어떤 수익도 얻지 못했고, 이후에도 자신이 부른 어떠한 곡에 대해서도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미국 영화 <Get Yourself a College Girl(1964)>에서 스탄 게츠와 함께 출연해 ‘The Girl from Ipanema’를 노래하는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나는 그들이 보이게 하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바다를 마주한 아틀란티카 대로에 사는 ‘부잣집 소녀’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나라는 자신이 아스트루드처럼 미국인들의 입맛에 영합하는 순종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The Girl From Ipanema’를 평생 부르며 살고 싶지는 않다고, 특히 그것의 영어 버전은 더더욱 부르기 싫다고 보사노바계와 완전히 선을 그어 버린다. 이후 나라는 1965년 『O Canto Livre de Nara』를 시작으로 예술계에 대한 검열이 극심해진 70년대 이전까지 MPB의 최전선에서 활동한다. 이때 함께한 아티스트들만 해도 지우베르투 지우Gilberto Gil,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 시쿠 부아르키Chico Buarque 등 현대 브라질 음악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이 극에 달한 1969년 말에 이르러 나라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공개적인 저항 운동을 계속할 수 없겠다는 한계를 직감했고, 투옥의 위협을 피해 영화감독인 남편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과 몇 년이 지난 1971년, 나라는 보사노바로의 회귀를 알린다. 그녀가 파리에서 녹음한 『Dez Anos Depois』는 다름 아닌 보사노바 스탠다드 넘버들의 리메이크 앨범이었다. ‘Chega de Saudade’, ‘Insensatez’와 같은 대표곡들뿐만 아니라 ‘The Girl From Ipanema’의 순수 포르투갈어 버전인 ‘Garota de Ipanema’까지 나라의 목소리로 수록되어 있었다. 7년 전 보사노바와의 결별을 선언했던 나라의 내면에서는 어떤 시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Dez Anos Depois』는 ‘10년 후’라는 의미의 제목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라가 정치적 맥락 바깥에서 보사노바에 느낀 일종의 향수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사실 그녀는 음악적으로는 보사노바와 완전히 결별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결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보사노바가 아닌 브라질 민중의 것이 아닌 엘리트층에 종속된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보사노바계의 흐름이었다. 나라의 가사는 지극히 정치적이었고 이전보다 삼바의 정석적 리듬에 가까워졌지만, 담백하고 섬세한 톤의 보컬은 보사노바 아티스트로서 알려진 데뷔 초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Dez Anos Depois』에서 나라가 보사노바 스탠다드 넘버들을 재해석한 방식은 원곡의 경쾌한 정서와는 명백히 달랐다. 그녀는 원곡보다 사운드를 덜어 낸 기타 솔로 위에 오로지 포르투갈어로만 노래했고, 우울한 분위기의 ‘Insensatez’를 첫 곡으로 내세운 것처럼 쓸쓸함의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나라의 ‘Garota de Ipanema’가 그려 내는 것은 한낮에 이파네마 해변을 거니는 소녀의 모습이 아닌 그녀를 멀찍이서 촬영한 흑백 사진이었다. 『Dez Anos Depois』는 결국 보사노바에서 시작된, 그리고 한때 그녀와 교류했던 아파트의 동료들에 대한 애증 섞인 회고와도 같았다.

또 한 번 10여 년이 흐른 1985년, 나라는 일본 방문 당시 ‘Garota de Ipanema’를 일본에서 녹음한 버전으로 다시 한번 발매한다. 이는 나라의 생전 마지막 앨범이 되었고, 보사노바를 떠났던 보사노바의 뮤즈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사노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녀의 커리어를 끝맺는다. 당시 일본 방송에 출연한 나라는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의 대표곡인 ‘Samba de uma nota só’와 ‘Samba do Avião’을 부르는데, 이때는 함께한 기타 연주자는 다름 아닌 한때 그녀를 비판했던 호베르투 메네스칼이었다. 그 해 브라질의 군부 독재 시대는 막을 내렸고, 보사노바가 민중의 것으로서 자유를 되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9년, 나라 레앙은 47세의 나이로 이르게 그녀의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