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과 불의 필름

WEBZINE
WEDITOR   임채윤



1.
누구에게든 기분이 심란할 때 찾게 되는 얼굴이 있을 테고, 그 사람의 얼굴을 직접 사진으로 보지 않더라도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정이 단숨에 가라앉는 그런 얼굴이 있을 것이다. 좀 이상하지만 내겐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의 얼굴이 그러한데, 언제부터 그에게 그런 인상을 갖게 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 연원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남긴 믿기지 않는 일화들, 예를 들면 친애하던 평론가 로테 아이스너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그녀를 만나러 뮌헨에서 파리까지 800킬로미터의 거리를 얼음 위로 걸어간 것과 같은 이야기는 내가 들어본 어떤 이야기들 중에서도 가장 근사하게 들렸다.

“아이스너는 죽어서는 안 된다, 죽지 않을 것이다, 허락하지 않겠다. 그녀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아니, 그녀는 죽지 않았지, 죽지 않을 테다. 나의 발걸음은 확고하다…….”

헤어조크에 관한 다른 일화들은 그만큼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고, 사실 헛웃음 짓게 만드는 일화가 더 많은 것 같다. 아무렴 그는 왠지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고, 여기저기 깜짝 등장해 당대의 영화에 관해 훈계를 놓기도 했으니까,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AI가 현존 감독을 모방해 시나리오를 적은 것으로 주목받은 〈그를 찾아서(2025)〉에서 하필 헤어조크를 모방토록 한 것도 그래서일까? 누구 하나가 대표로 맞붙어야 했다면, 혹은 누구 하나를 영원화시켜야 했다면 헤어조크가 되어도 좋았을 테니까? 여하튼 내 인상 속에 그는 영원히 얼음의 땅 위를 걷고 있다.




2.
오손 웰스가 필름이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안전 필름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값싸게 이용되던 질산염 필름은 화약과 구성 성분이 유사해 한번 불이 붙으면 멈출 줄을 모르고 타올랐고, 제대로 보관되지 않으면 자연발화하기도 했고, 그 불은 물속에서도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창고의 구석 자리, 아니면 영사기 안에서 조용히 불빛을 내며 극장과 현상소, 아카이브를 전소시켰다. 집안의 유산과 함께 타오르는 건물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깜깜한 뒷모습들. 화마에 대한 필름 영화의 공포는 문화적 인자와도 같은 그 망연자실한 뒷모습들을 반복해서 빚어왔다. (아니면 폭발을 등지고 걸어오거나….) 아이스너와 함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창립해 필름 보존에 힘쓴 앙리 랑글루아의 유년기를 사로잡은 악몽 또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고향(스미르나)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었다. 〈시티즌 랑글루아(1995)〉에서 진술하듯 그를 한때 사로잡은 것은 불타는 도시에서 빼내지 못한 귀중품들에 대한 반복되는 꿈이다.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비로소 그 영화의 끄트머리에 나타나는 온전한 필름 이미지가 바로 그 잃어버린 귀중품이며 마치 불사조와 같다고 말한다.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플래허티는 자신의 3만 피트짜리 필름을 담뱃불로 죄다 태워 먹었을 때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 잿더미를 얼음 속에서 소생시키겠다고 발길을 돌리거나 돌리지 않기 이전에.)




3.
오래된 필름에 대한 꾸준한 애호심으로 파운드푸티지 작업을 이어온 빌 모리슨의 2016년 작 〈도슨 시티: 얼어붙은 시간〉은 얼음에 묻혀 있던 필름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를 들려준다.

*스포일러
1890년대 클론다이크 강 일대에서 골드러시가 벌어질 무렵, 캐나다 서북부의 도슨은 일종의 거점 마을이었다. 골드러시 붐이 끝나면서 주민의 수도 점차 줄어들었지만 도슨에는 각종 제반 시설이 들어왔고, 무성 영화를 틀기 위한 극장도 지어졌다. 그런데 캐나다 서북부, 영화 배급줄의 말단에 있던 도슨에서는 개봉한 영화를 보려면 필름이 오기까지 3년에서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영화 배급업자들은 상영이 끝난 필름을 돌려받는 데 드는 반송비를 부담하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도슨에서 필름을 대신 처리해 줄 것을 청했다. 필름의 처리는 도슨의 은행이 대리했다. 그들은 필름을 도서관 지하 창고에 몰아넣었는데,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는 가득 차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도슨 수영장 풀에 쓰레기와 필름을 가득 채워 넣곤, 그 위에 얼음을 깔아 빙상장을 만들었다. 빙상장 아래 묻히지 않은 필름은 모두 유콘 강에 떠내려 보내거나 강변에서 불태웠다. 도슨에 토키 영화가 들어오던 무렵이었다.

빙상장 아래 묻힌 질산염 필름들은 1978년에 새로 지을 레크리에이션 센터 부지를 파던 중에 발견되었다. 그 이전에는 봄이 되어 아이스링크가 녹을 때마다 필름이 땅 밑에서 나타났고, 아이들은 그걸로 불장난을 했다. 땅의 습기는 수십 년 동안 필름 위에 작고 많은 반점을 남겼다. 필름이 돌아가면 그 반점 위로 마치 불이 번진 것처럼 보이고, 거기 안의 인물들은 그 불을 끄려고 허둥대는 것처럼 보인다.




4.
이런 주제의 파운드푸티지 작업이 맞닥뜨리게 되는 의혹은 어떤 경우이든 엇비슷한 것 같다. 불타는 듯 보이는 그러한 물질적 흔적들이 어느 정도는 물질성의 효과를 내기 위해 연출된 것이거나, 푸티지의 역사적 맥락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시간의 증거로서 그것이 암시하는 ‘장거리 관계’ 자체에 매혹되어 버리는 어떤 맹목성이 있으니까. (가령 모리슨의 단편 〈Light is Calling(2004)〉은 부패 속에 녹아내리는 연인의 모습을 눈부시게 그리는데, 그의 원본이 되는 영화 〈종(1926)〉은 여관 주인이 유대인 상인을 죽여버리고 그 돈으로 연인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내용이다. 그 사랑을 형성하는 힘이 모리슨의 작품에선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기록 푸티지들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고….) 현대 작곡가들과 협업한 그의 작품들이 아카이브의 손실과 파멸을 보여주는 것치고 지나치게 매끈하며, 왠지 좀 오페라풍의 비조에 심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작업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은 슬그머니 ‘폐허 포르노’ 같은 멸칭을 꺼내 들곤 했다.

〈Light is Calling(2004)〉 


〈사건(2023)〉

그런 지적을 돌아보면, 도슨의 지역사를 조망하는 <도슨 시티>는 그의 작품 중 조금 예외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의 최근작 〈사건(2023)〉은… 얼핏 봐선 그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었다. 2018년 시카고에서 경찰이 흑인 시민을 총으로 쏴서 살해한 사건을 CCTV와 바디캠 이미지를 4분할로 병치해 보여주는 이 작품은, 비인간적 이미지를 활용한 대항 시각적 다큐멘터리들, 가령 감각민족지학연구소나 포렌식 아키텍처의 작품들과의 유사성을 더 헤아려보게 만든다.

그러나 아래에 옮긴 그의 말을 참고해 단순하게나마 그의 저 이례적인 작업을 어떤 통일성 아래 놓아본다면, 필름 시대의 불이, 불타는 집을 나란히 서서 바라보는 장면이, 그것의 기제와 두려움이 모두 어디로 옮겨 갔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불이라고 여기지 않게, 더이상 불이라고는 부르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글리치나 디지털 풍화 같은 것으로도 전해지지 않는 비가역성과 절박함의 함의를 잃어버린 아카이브가 단지 덧없이, 이따금 쏠쏠한 재미를 주기도 하면서 강박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만을 주는 지금에 와서는 말이다. 그것은 언제쯤이 되어서야 불빛을 내기 시작할까?

인터뷰어: 당신의 초기 작업들은 물리적 필름의 부식decay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건>은 압도적으로 넘쳐나는 디지털 영상들을 다루고 있지요. 이러한 전환은 당신이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빌 모리슨: 〈사건〉 역시 아카이브 작업입니다. 다만 아카이브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죠. … 부식된 필름은 손에 넣기 어렵습니다. 특정 아카이브와 맺고 있는 저의 특권적인 관계 덕분에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의 유실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그것을 복제해 제 영화 속에 넣지 않았다면, 정말로 사라졌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건>이 다루는 것은 다른 형태의 소멸입니다. 이 영상들은 너무 흔하고 어디에나 있어서, 너무나 방대한 아카이브 속으로 떨어져 보여지지 않게 됩니다. 유사한 영상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연히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당국이 “여기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도장을 찍어버리면, 우리는 대개 다시 돌아가 그 영상을 검토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다른 종류의 퇴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동시에 아주 문자 그대로 사회적 쇠퇴decay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