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개-싫어
WEBZINE
WEDITOR   송혜령


SNS에 영화 후기가 공유되는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개인 리뷰에 불호를 표하는 글이 유독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후기의 후기인 셈이다. 다만 정확히 ‘후기’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 글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개인적인 경험 서술이 주된 내용이니, 차라리 코멘트에 가깝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 영화를 이렇게밖에 못 보다니, 수준 낮다.’ ‘이렇게 읽으라고 만든 영화가 아닐 텐데.’ ‘이 영화를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임? 너무 징그러움.’ 이 코멘트들은 내가 즉석에서 지어낸 문장이지만, 분명 어순까지 똑같은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꺼낸 요지는 단순하다. 왜 남의 감상에 왈가왈부를?

개인 SNS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에 참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듯 보인다. 훈수를 두기도 하고, 비난을 하기도 하며, 그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영화 감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최근 들어서’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애매할 만큼, 이는 남의 감상에 삿대질을 하는 SNS 고유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니 말이다. 다만 최근 이러한 동향은 확실히 거세졌다. 영화 후기만 오가는 SNS가 아니더라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목을 끄는 영화에 대한 평가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런 영화더군요.’ 같은 비교적 고전적인 후기부터 ‘이런 장면이 나오다니 진짜 역겨웠음.’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개봉주를 기준으로 온갖 감상들이 범람한다. 여기에 특정 영화의 팬덤이 형성되고, 그 팬덤을 중심으로 마케팅이 이루어지는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호불호의 대립은 더욱 가열된다.

일반 관객들이 점차 영화관에서 발길을 돌리자, 대형 영화는 물론 수입사들마저 팬덤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팬덤은 단순한 마케팅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감상이 유저들을 훑고 지나가면, 비슷한 결의 감상들이 갑작스레 우후죽순 생겨나고, 이들이 N차 관람을 반복하며 일종의 결속을 형성한다. 혹시 기대하고 있을까 덧붙이자면, 이 글에서 나는 그 어떤 영화나 영화인도 특정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 역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 모두 싫어하는 영화나 영화인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선입견 때문에 차기작을 보지 않거나, 취향이 맞지 않아 그 사람이 출연한 영화는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경험쯤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하다. 한데 이것이 나쁜가 하면, 그저 취향일 뿐이다. 탄산을 피하거나 김밥 속 오이를 빼는 것처럼, 훈수는 둘 수 있어도 결국 너에게도 나에게도 하나씩 있는 취향이다.  그런데 유독 누군가가 특정 영화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거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은 반대로, 누군가가 특정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걸까? ‘모두들 싸움을 멈추고 그냥 영화나 보세요.’라고 말하고 싶다가도, 내게도 적극적인 이해를 요구한다면 눈쌀이 찌푸려지기 마련이다. 혹자는 이를 단순한 악플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 커피 왜 좋아하냐’는 식의 무지성 악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누군가의 후기에서 강제성이 느껴진다는 점에 있다.

“난 사실 그 커피가 맛없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 근데 그게 너무 마음에 걸리더라고. 그 커피 셔. 난 신 커피 싫어. 신 커피를 왜 시다고 말 못 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감상이다.

“다들 그 영화 좋다고 해서 봤는데, 나는 꿀잠 잤어.”
이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이 영화 안 봐도 될 듯. 사람들 몰고 다니면서 바이럴 된 것 같으니까, 난 앞으로도 볼 일 없음. 영원히.”
물론 존재할 수 있다. 불호를 느낀 것은 확실한데, 무언가 더 거슬린 지점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투이다. 한데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무엇이 걸리는 걸까. 영화를 보지도 않고 말을 얹는다는 점? 다수의 칭송이 없었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 같다는 점? 아니면 이 영화를 추천한 내가 공격받은 것 같은 기분 때문일까? 아마 이보다 훨씬 많은 지점들이 누군가를 괴롭게 할 것이고, 그로부터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내 후기는 바이럴이 아니다.’ ‘색안경이다.’ 같은 말들이 뒤따르는 식으로.

앞서 말했듯 감상에 대한 설전은 영화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다만 그 밀도와 빈도는 확실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의 역사를 조금만 들춰봐도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과거에는 대중보다는 마니아를 위해 만들어진, 이른바 B급 영화들이 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마니아들은 대중의 불호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장르 영화들은 일정한 불호를 전제로 완성되기도 하기에, 최근의 과열된 양상과는 결이 다르다. 옹호보다는 설명에 가까운 것이 마니아들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문제시되는 대상은 그런 B급 영화들만도 아니다. 때로는 예술 영화이기도 하고, 때로는 대중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장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다수의 담론이 쌓이기만 한다면 어떤 영화든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 ‘강제성을 띤 후기’일 것이다. 더 이상 영화 관람은 가벼운 취미로만 치부되기 어렵다. 높아진 티켓값과 불안정한 관람 환경 속에서, 누군가의 불호 후기 하나는 생각보다 치명적인 영향을 가질 수 있다. ‘재미없다’는 다수의 의견은 누군가의 관람 기회를 무의식적으로 빼앗고, 어떤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어지는 마음은 개인의 감정을 격화시킨다. 누군가의 ‘불호 후기, 받아들일 수 없음.’은 어쩌면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마케팅 차원에서 시작된 관객의 팬덤화 역시 일정 부분 기여하는 바가 있다. 팬덤은 개인 관객에게 소속감을 부여한다. 사실상 모두가 예매할 수 있는 회차임에도 ‘○○영화 팬 상영회’라는 명칭을 비롯한 굿즈 지급, GV는 참여해야 할 것만 같은 심리를 자극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결속감과, 이를 전면 부정하는 불호 후기는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영화 제작 산업과는 별개로 생성되는, 영화 이후의 담론들이다. 실질적인 손해를 보는 이는 없지만, 자신의 시간과 감정이 폄하되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굳이 팬덤에 속하지 않더라도, 나의 감상이 곧 나의 경험과 맞닿아 있는 이상, 그것이 깎여 나가는 느낌은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제 ‘넌 재미없었어? 희한하네.’ 하고 넘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닌 셈이다.

물론 모든 영화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눈에 띈다는 사실 자체가, 이것이 절대적인 풍조는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니모를 찾아서>에 대해 긴 불호 후기를 쓴다고 해서 관객들이 관람을 멈출 리는 없다. 이미 충분한 관객 수와 흥행을 확보한 상업영화일수록, 후기 하나가 갖는 영향력은 줄어든다. 어쩌면 이는 후기 하나로 평가가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관 수를 충분히 배정받지 못하는, 취약한 위치의 영화들에 국한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넷상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모든 행위는 쉽게 정당성을 획득하지만, 이 격앙된 분위기를 만든 범인은 결국 그 환경 자체가 아닐까.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사실 이 모든 것은 ‘영화 보는 사람들’에서 출발한 문제이기도 하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문제는 시네필이다. 여기서 시네필이란, 그저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 ‘보고 나면 감상을 남기는 사람’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니 다가올 2026년에는 우리 모두 영화를 조금만 덜 심각하게 즐겨보는 건 어떨까. 지금처럼 영화를 보되, 오직 내 감상만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영화 <스크림>에는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명대사가 하나 나온다. 분명 많은 시네필의 마음을 울렸을 그 대사. “미쳤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야.” 가끔은 정말로,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시네필’이라는 불어 단어 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앞으로도 영화를 그저 영화로 볼 수 있기를, 작게나마 바라본다. 그리고 이건 전부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니 너무 분노하지는 말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