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영화 이미지(와 영화 몇 편에 관하여)
WEBZINE
WEDITOR   최서윤


그래서 벨은 여행지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을 모사한 그림들을 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그림들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인상과 기억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릴 뿐 아니라, 심지어 완전히 파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가 드레스덴에서 보았던 <시스티나 성당의 성모마리아>, 그는 아무리 애써도 그 그림을 뮐러 상점에서 파는 기념품 그림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기억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같은 미술관에서 보았던 멩스의 보잘것없는 파스텔화는 어떤 모방품의 인상으로도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눈앞에 또렷하게 떠오른다고 썼다.

- W.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창작물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 가장 큰 난관은 사적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영화 속 이미지에서 과거의 낯익은 인상을 여과해 내기란 쉽지 않고, 그럴 수 있도록 일시적인 기억 상실을 돕는 망도 없고, 무엇보다 백지 상태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한들 무색무취의 감상이 되고 될 것이다. (같고도 다른 맥락으로, 이전의 ‘새것에 관한 신화’라는 글에서 백지 상태에 대한 갈망이 헛된 것일 뿐임을 지적한 페촐트의 말을 인용했었다) 예컨대 아녜스 바르다의 단편 <당신 집 계단은 아름답군요…T’as de beaux escaliers, tu sais…*(1986)>에서 이자벨 아자니가 오르는 계단을 보고, 언젠가 어릴 적 방문했던 미술관의 계단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가 불과 3분밖에 되지 않는 이 영화에 반사적인 호감을 가지게 된 동기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그냥 아름다운 이자벨 아자니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고. 물론 실제 배경은 제목 그대로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émathèque Française였고, 이 단편은 시네마테크 개관 50주년을 맞아 바르다가 그곳에 헌정한 영화였다. 내가 떠올린 서울 송파구의 소마미술관과는 당연히 9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만큼이나 무관하게 떨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KMDb를 비롯한 한국 포털사이트에는 왜인지 ‘시네마테크의 계단’이라는 상당히 심심한 제목으로 등록되어 있다.



저마다 지끈거릴 정도로 기억의 망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장면이 있다면, 나에게는 앞서 말한 어릴 적 엄마 손에 데려가졌고 마침내 좋아하게 된 미술관에 관한 기억일 것이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을 집에 가져갈 수는 없으니 전시 팜플렛과 엽서를 닳도록 펼쳐 보거나, 갖고 싶은 욕망을 팜플렛 위 낙서질로 투영하던 습관, 미술관에서 간헐적으로 열렸던 맛있는 카나페를 나누어 주던 다과회… 차갑고 개방감 있는 현대식 건물을 구식 가옥보다 안락한 공간이라고 느끼게 된 계기들. 나는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이제는 서울시민도 아니지만 미술관 건물을 이상적인 공간의 지표로 여기며 살아 가고 있다. 비슷하게 누군가는 디지털 비디오의 형태로 투사되는 픽셀 단위의 이미지에서 햇빛에 파랗게 변색된 필름이나 다 낡아 바스라지는 앨범의 내지와 유사한 감각을 습관적으로 매만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에서 사적인 기억과 결부되어 거부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이미지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개중 나의 감상에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은 공간 이미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기억 속의 공간과 그다지 닮은 것이 아니거나 심지어는 공간에 대한 기억 자체가 퇴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그 잔상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나의 마지막 방문은 서울을 떠나기 이전인 아홉 살이었을 것이고 그 이후로는 소마미술관에 가본 적이 없다. 가려는 마음은 먹어보았지만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음을 약도라고 한다면 좋아하던 공간들은 이미 일종의 랜드마크로 거대하게 마킹된 지 오래였고, 그곳에 다시 방문한다 한들 반가움의 감정보다는 사라지고 변화한 것들에 대한 유감과 실망으로 물들 것이 분명하므로.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어떠한 모방품에도 오염되지 않은 공간 이미지에 대한 대안적인 버전의 영화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이미지를 오염시키거나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모방품과는 다르다.

영화 자체는 좋지 않지만, 혹은 좋더라도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단순히 아름다운 배경을 이유로 허점을 눈감게 되는 영화들을 꺼내 놓으려고 한다. 물론 아름다움이란 영상미라는 말 따위로 포섭되는 개념 말고 내 유년 시절에 새겨진 코드와 맥이 닿는 것들이 것이 기준이다. 미술관 말고도 어린 시절 거주하던 저층의 아파트, 과거의 누군가에 의해 알게 되었던 서울 한복판의-너무 한복판이라서 거짓말 같은- 피난처 같은 공간, 여행지에서 계획상에 없었지만 가장 느긋하게 머물렀던 공원, 또…. 복합적으로 뭉쳐 있는 기억들이 감응하는 것들을 늘어놓는 과정에서 저마다 나와는 다른 사적인 이유로 반응하게 되는 이미지가 얻어걸리는 행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등장하는 오로지 하나의 공간 혹은 장면에 매혹되어서 작품 자체를 고평가한다는 건 아무래도 비이성적인 행위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영화를 보면서 이성을 찾으려 한다면 금세 소진되고 말지도 모를 테니까. 왜 아름다운지를 적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각기 다른 기억에서 아름다움이 파생되었다고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그런 기억을 되짚는 과정에서 영화를 자연스레 소화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 있을 것이다. 영화를 분절된 단위로 해석하거나 이해하려는 선결정적인 태도 이전에 은밀한 소통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1. 오후(2007), 앙겔라 샤넬렉



독일의 주요 감독들과 베를린학파로 묶이곤 하는 샤넬렉이지만 그녀가 만들어 내는 화면은 확연히 다르다. 연극 배우로서 그녀의 오랜 경력이 여러 방향으로 독특하게 작용한 덕인데, 서사 진행과는 무관한 연극 리딩 장면을 툭 집어 넣거나 사건에 대한 설명 없이 전후 과정만을 남겨 놓는 방식으로 연극적 관습과 영화적 관습 모두에서 벗어난 길을 간다. 이런 그녀가 비추는 자연은 인간의 거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기에 오묘하게 느껴진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자유롭게 각색한 <오후>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은 샤넬렉 본인이 연기하는 ‘이레네’와 가족이 머무르는 어느 강가의 단독주택이었다. 인물이 홀로 사색에 잠길 때나 대화를 나눌 때 배경이 되는 베란다에 우거진 나뭇가지의 초록빛이 채색된 것처럼 아름다웠다.






물론 이런 자연은 강가의 평온함과 집안 내부 가족의 일상에서 감도는 무척 체호프적인-드라마틱한 사건보다 일상 대화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불화하는- 고뇌와 긴장감의 경계에 놓여 있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평생을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자연이 건물의 안과 밖에 공존하는 낯익은 풍경이 더더욱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베란다 앞에서 여러 인물의 사색 혹은 대화가 변주되면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창틀 사이의 풍경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도 꽤나 재미있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겠지만, 샤넬렉의 예민하고 마른 눈빛과 인상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했음을 짚고넘어가지 않기 어렵다….)




2. 찬란함의 무덤(2015),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아피찻퐁의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찬란함의 무덤>은 제목만큼이나 이질적인 시공간 이미지로 유난히 나를 사로잡는다. <오후>와 유사하게 빽빽히 우거진 나무와 인공적으로 세워진 건물들 간의 대비가 차가운 화면의 색감과 맞물려서 후덥지근한 환경 안에서도 만들어 내는 서늘함이 인상적인데(이런 오묘함은 <징후와 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수천 년의 역사적 맥락이 덧씌워진 지극히 태국적인 풍경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어쩐지 오래 전에 떠나온 듯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수천 년 전까지는 아니어도 말이다.



다른 방향으로 눈에 띈 공간은 옛 학교 건물을 개조한 병원인데, 정체 모를 ‘수면병’에 걸린 군인들이 잠을 자며 회복하는 곳으로 각 병상마다 의료기기처럼 보이는 네온빛의 길쭉한 튜브가 설치되어 있다. 밤마다 이 튜브가 형형색색 발광하다가 날이 밝으면 점멸하면서 창밖의 푸른 잎들이 드러나는 시각적인 변화는 솔직히 당혹스러운 구석이 있다. 최첨단 LED 기기처럼 보이는 동시에 다소 원시적으로 느껴지는 비주얼 때문일까…? 이 풍경은 가뜩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영혼들이 배회하고, 잠든 영혼과 살아 있는 자들을 연결해주는 영매가 돌아다니는 기묘한 시간성과 공간성을 더더욱 흐려 놓는다. 그러나 당혹스럽다는 표현은 나에게 곧 매혹적이라는 말로 통한다.



참고로 <찬란함의 무덤>으로 불리는 이 영화의 태국어 제목은 รักที่ขอนแก่น, 콘깬에서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널리 알려진 제목보다 명확한 지역성과 공간성을 드러내는 이 제목을 곱씹어 보면서 영화를 다시금 감상하다보면, 살아 있는 자들이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유령들을 돌보는 콘깬의 풍경이 더없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3. 연인처럼 숨을 멈춰(2014), 이가라시 코헤이







이가라시 코헤이는 여느 일본 감독들처럼 자연의 풍경을 느긋하게 응시할 줄 아는데, 이를테면 <슈퍼 해피 포에버(2024)>에서 휴양지의 맑은 바닷가, <다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2017)>에서 아오모리현의 새하얗다 못해 흐드러지는 설원이 그렇다. 사실 그가 담은 것 중 나에게 자연보다 매력적인 이미지는 이쪽이다. 그의 초기 장편작인 이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공간은 자연이 아닌, 디스토피아적 설정 속 전쟁의 불안으로 그늘진 쓰레기 처리 공장이다. 공장을 밤새 떠돌아다니는 직원들도 마치 아피찻퐁 영화 속의 유령 같지만… 발소리가 울리기 딱 좋은 고요하고 공허한 복도나, 공장을 이루는 차갑고 어두운 콘크리트 벽 등이 짧지 않은 쇼트들로 담겨 있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뭔가 백룸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겐 숨어들기 좋은 장소지만,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공존하는 공간. 혹은 결혼한 공장 직원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극중 인물인 ‘타니’의 사적인 불안이나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영화에서 역시 자연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무실 창 너머로 흐릿하게 푸른 형체가 보일 뿐이다. 이 공간 이미지에 끌린 이유는 앞선 두 작품과는 사뭇 같고도 다른데, 그저 개인적인 이유로… 어릴 적부터 방해받지 않는 공간을 좋아했고, 가장 조용하고 차가운 지점에서 이상하게도 가장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술관 건물의 영향일 수도 있고, 사람의 소리가 다른 무엇의 소리보다도 작은 공간을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솔직히 끝맺음이 좋은 영화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위처럼 아무도 없는 텅 빈 로비에 새해 맞이 슬로건이 덩그러니 붙어 있다든지, 타니가 홀로 잠든 사무실에 무장한 군복 차림으로 잠을 깨우러 온다든지, 이런 기묘한 이미지만으로도 나에게는 좋아할 이유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