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극장 붙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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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이영서



“I love you to death” on a seat of the abandoned Versailles theater.
Beirut, Lebanon, 26 November, 2013 by Myriam Boulos

소파와 의자의 중간쯤 되는 푹신함을 가진 붉은색 좌석들, 미약한 불빛을 내뱉는 표시등을 제외하고는 한없이 캄캄한 이곳. 레바논의 사진가 미리암 불로스Myriam Boulos는 베이루트의 버려진 극장에 〈I love you to death〉라는 퍽 로맨틱한 이름을 붙였다. 시위로부터 시작된 혁명의 기록을 담은 사진집 『What’s Ours』의 한 면을 꽉 채우는 떠나간 극장의 이미지, 소복이 쌓인 먼지로 그려진 하트 모양의 낙서는 수명을 다한 장소를 향해 아쉬운 인사를 건네는 듯 보인다. 그의 사진 속 영화관은 더 이상 영화를 보기 위한 곳이 아닌 저항과 폭력의 역사를 간직한 채 소멸하는 곳이다. 와해하는 극장 위 개인적인 기억과 정치적인 기억이 강력한 이미지로서 혼재하는 것이다.





극장은 생각하면 할수록 특이한 공간이다. 이곳은 모두의 것인 동시에 누군가의 것이다. 관객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집단으로서 잠시간 스크린과 조우하다가,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다시 소규모의 단위로 흩어지고는 쉽게 헤어진다. 이제는 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영화를 관람할 수 있지만, 여전히 영화관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아주 사회적인 장소로 존재한다. 또한 극장은 현실에 있으면서도 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사운드와 이미지로 메워진 화면에 집중하다 보면 금세 영화라는 꿈속을 유영할 수 있게 된다.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헤테로토피아에서의 예술적 경험은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다가도 또 다른 집단적 기억으로 덧입혀지기 십상이다. 기꺼이 겹쳐지기를 선택하는 이중적 장소는 심지어 때로는 영화라는 본래의 기능을 잊은 채 단지 응집의 장소로 존재하기도 한다. 조금은 수상한 목적을 가지고 익숙하게 각자의 자리를 찾은 사람들. 혹은 극장을 떠나지 못한 채 맴도는 유령들.







가령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2003)〉 속 영화관에서 순수하게 영화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곧 폐관될 복화대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이곳은 더 이상 영화를 보는 공간이 아닌, 각자의 본심이 닿아 있는 장소이다. 아끼던 극장에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는 노배우라든가, 다소 음험한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남자라든가, 반쪽짜리 호빵을 들고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영사기사를 찾는 매표원이라든가. 이들 모두는 영화에는 관심이 없고, 떠나가는 극장을 미로 삼아 거닐며 구석구석을 배웅할 뿐이다. 주인공을 자처하는 영화 〈용문객잔(1967)〉은 관객을 비추는 유일한 조명이자 빗소리와 더불어 몇 안 되는 배경음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죽음(또는 죽음에 대한 언급)은 인간을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환영적인 조건, 즉 그들이 행하는 각각의 행동은 마지막 행동이 될 수 있고 꿈속의 얼굴처럼 희미해져서 지워지지 않을 얼굴은 하나도 없다는 것 때문에 동요한다. 그렇게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닌다. 반면에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행동(그리고 각각의 생각)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과거에 그 행동이나 생각보다 먼저 일어났던 다른 행동이나 생각의 메아리이다. 그리고 미래에 어지러울 정도로 되풀이될 또 다른 행동이나 사고의 정확한 예언이기도 하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곧 폐허가 될 장소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보르헤스의 표현을 빌려, '죽을 운명의 존재'인 나의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영화관을 '죽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안녕, 용문객잔〉은 죽음을 앞둔 극장을 영화라는 반사 미로에 가둔다. 카메라는 한때 관객으로 메웠던, 이제는 텅 빈 영화관의 비어있는 얼굴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그 공허는 어쩐지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2003년 복화대극장은 이미 사라졌을지언정 렌즈를 투과한 기억의 여분은 필름에 묻어 언제고 어디서고 반복 가능한 새로운 물성을 지니게 된다. 물론 실재가 사라지고 남은 영화는 원래의 극장과 꽤나 다른 모습일 테지만, 〈안녕, 용문객잔〉의 관객은 화면에서 익숙한 냄새와 날씨와 애정이 묻은 자기만의 장소를 떠올린다. 언젠가 이별했을, 혹은 이별을 앞둔 모든 죽을 운명의 존재들이 강한 향수에 이끌려 희미하게 소환될 즈음, 영화는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 노래 하나를 남겨두고 홀연히 곁을 떠난다.





집이라는 안온한 울타리를 벗어나 서울에서 가장 정을 두고 있는 부분을 꼽으라면, 광화문 어드메의 영화관 몇 군데를 고를 테다. 언젠가부터 극장은 때로는 불안한 영혼의 안식처로, 때로는 생동하는 놀이터로서 가담하며 일상에 부지런히 개입하곤 했다. 어두컴컴한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면 방향이 어찌됐든 애호를 같이 하는 사람들과 있다는 생각에 이상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 공간에 닿은 먼지 한 톨이 괜히 안쓰럽게 느껴진다. 서운함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퍽 간지러운 이 마음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주제넘게도 떠나가는 극장을 자꾸만 붙잡고 싶다…. 우리의 극장에 대한 기억이 될 수 있는 대로 지속하기를 바라며, (비록 극장은 아니었지만) 지난겨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안녕, 용문객잔〉을 다시 보았다. 보르헤스가 예언하듯 어쩌면 사라지기 마련이기에 더 붙잡고 싶은 장소일지 모를 극장에 (혹은 영화에) 대고 연명을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