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 워즈 낫 어 롤링 치즈

게임 오브젝트에 관해

WEBZINE
WEDITOR   임채윤


영국 쿠퍼스 힐의 유서깊은 치즈 굴리기 축제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을 때, 나는 치즈를 따라 굴러가는 사람들에게서 가상의 산비탈을 따라 나뒹구는 게임 래그돌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조금 죄스럽게 느껴져서 굴러가는 사람 대신 굴러가는 치즈를 향해 주의를 돌렸지만 새삼스런 의문만 더해질 뿐이었다. 사람이 언덕을 구르는 일은 뉴스가 아니지만, 그가 치즈를 뒤따라 구르면 뉴스가 된다…? 왜 하필 굴러가는 것은 치즈여야 했을까? 과연 그 치즈로 요리를 만들어 우승을 기념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꼬리를 문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애초에 치즈를 언덕에서 굴려 볼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처음 나온 것일까?

그리고 며칠 뒤, 나는 PC Gamer를 둘러보던 중 치즈 굴리기 축제가 비디오게임으로 제작되었다는 놀랄 만한 소식을 발견했다(개발진은 아마 이러한 방식으로나마 깊은 물음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 게임은 가상의 언덕, 혹은 용암지대나 설산을 배경으로, 간소한 유럽풍의 의상을 입은 사람을 조종해 ‘노랗고 납작한 원통형 물체’를 쫓아 굴러가는 멀티플레이어 게임이었다. 게임의 이름이 <치즈 롤링>이니까, 비록 텍스처 해상도가 낮아 분간하긴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치즈일 터였다. 한데 단지 언덕을 멈춤 없이 구를 뿐인 그 물체를 꼭 치즈로 보아야 할 이유를 뭐라 단정해 말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외형상으론 오히려 북을 닮았는데? 물체의 기묘한 용법이 게임으로 변성되고 나면 그것은 한층 더 가벼워진다. 신실함이 지나친 플레이어라면 조금 더 간명한 관계를 원할지도 모르겠다.


치즈


열리지 않는 문은 허구적이다

게임 속의 물체와 현실 사물 간의 관계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게임 연구자 에스펜 오르세트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구분을 제시했다.

[열리는 문은 가상적이고, 열리지 않는 문은 허구적이다.]

오르세트가 부연하는 바는 이렇다. 현실에서 우리는 문을 열고 닫는 식으로 문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게임 속에서 여닫을 수 있는 문은 시뮬레이션된 ‘사물object’이고, 여닫을 수 없는 문은 세계를 장식하는 텍스쳐, 즉 ‘그림picture’에 불과하다. 물론 반문의 여지가 있다. 문을 열고 닫는 것만이 문과 관계를 형성할 유일한 방식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양상은 다채롭다. 예컨대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브라움이라는 캐릭터는 문을 방패로 삼아 날아오는 모든 투사체를 막아내는데, 그가 들고 있는 문(?)은 열리고 닫히는 기능 없이도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이처럼 예스퍼 율은 그가 직접 제작한 에세이 게임을 통해 오르세트가 주장한 ‘문 논증’의 허점을 짚으며, 게임 속의 물체가 현실 효과를 발휘하는 방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규칙 속에서’ 플레이어가 무엇을 목적하며, 그 맥락에서 물체가 우리의 행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점이다. 따라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 게임의 규칙이 무엇인지이다. 그 규칙 아래서 플레이어가 품도록 되어 있는 기대에 부응할 때야 비로소 물체는 ‘사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 오브젝트에 관한 게임>

게임 안에 가령 프라이팬이 있다고 해보자. 실제 프라이팬은 가열하여 요리를 하는 데 쓸 수 있는데, 무언가를 가격하는 데도 물론 쓰일 수 있다. 만약 어느 게임에서 요리를 하는 행위가 규칙상의 성패를 좌우한다면 ‘가열하여 고기를 굽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프라이팬의 사물됨에 있어 더없이 중요한 조건일 테지만, 단시간 배틀로얄 류의 게임에서는 오직 적을 공격하는 데 쓰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지, 그것을 가지고 요리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부가적인 문제이다. 물체의 전방위적인 속성 가운데서 게임은 그것이 더욱 진짜처럼 보이게 해줄 몇 가지 속성을 선별한다. 물체의 어떠한 속성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면, 플레이어들은 그 속성이 구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령 프라이팬 코팅이 갈수록 벗겨지는 현상까지는 정밀하게 구현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배틀그라운드> 5.1 패치는 프라이팬을 던지는 기능을 추가했다.

이같은 주장은 마치 요리 장르이냐 격투 장르이냐 하는 게임의 중심 메커니즘에 따라 물체가 갖는 사물성의 조건이 선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인상을 준다. 물론 게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돌아본다면 그로부터 비껴난 사례를 한없이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네를 발사대로 쓰고, 쓰레기통을 발사대로 쓰거나, 비행하는 새를 승강기처럼 쓰고, 폭탄을 타고 날거나, 슈트케이스를 발사체처럼 쓰고, 페인트 붓으로 공중 계단을 짓는 식의 사례들이 유쾌하게 떠오를 것이며, 스피드런과 같이 오브젝트의 용도를 임의적으로 재정의하는 제도가 널리 일궈지는 것만 보아도, 게임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들은 발견과 재구성의 헛짓들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은 루프 재생되는 영상인 한편 언제라도 새롭게 재발견될 수 있는 열린 관계망이다. 그런 면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악보를 읽는 것과도 다소 유사한데, 다중의 시간에 넓게 펼쳐진 행위성의 폭을 가늠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엘든 링>에서 플레이어들이 남기는 움직임의 잔상들을 떠올려 보자). 게임은 기본적으로 수행의 지시사항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수행 가능성의 기록이기도 하다.

게임의 이러한 양가적 측면은 물론 다른 말로도 설명될 수 있다. 자율성과 타율성, 혹은 플레이ludus와 서사narrative 사이의 엇갈림이라는 식으로. 캐릭터가 자신의 죄를 청산하기 위해 오른 구원의 여로에서, 플레이어가 정작 마차를 탈취하고 진지에 불을 지르거나 사람을 납치한다면 어떨까? 한때 사람들은 이 문제에 진지하게 몰두했고(게임에 관한 담론은 모두 여기로 수렴하는 듯했다), 이에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라는 이름을 붙이며 기존 서사 매체와 구별되는 지점에서 게임이 지닌 낯섦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이후로 유의미한 논의가 충분히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오늘날 게임에서의 ‘서사’가 CRPG의 강세와 함께 다변화되며 점차 루돌로지와 구분 불가능할 정도로 뒤섞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주된 원인은, 게임에서 ‘서사’라는 것이 갖는—그것이 인물관계나 이야기 같은 것을 의미하는 한—눈엣가시 같은 지위 때문일 수도 있다. 여전히 대다수 AAA급 게임에서 서사가 ‘상영’되는 구간은 게임플레이 구간과 분리되어 있다. 이에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를 즐기는 동안 서사의 진행을 사실상 무기한으로 미룰 수도 있다. 어느 영화 감독은 서사의 지위를 후킹한 이미지들을 걸어두기 위한 빨랫줄 정도로 본다고 말했는데, 이 표현은 그와 같은 게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브젝트의 관점에서 ‘서사’를 다르게 정의해본다면 어떨까? 오브젝트를 사용하는 표준적 방식과 그에 부여된 지시사항을 ‘서사’라고 정의한다면? “손에 든 총으로 저 사람을 쏴야 한다”라든지, “프라이팬으로 자기방어를 해야 한다"와 같은 픽션의 명령을, 사물에 대한 하나의 ‘용법'으로 환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안에 기입된 바람직한 용법들. 이같은 ‘미시 서사'들은 게임이라는 총체적 수행가능성의 덩어리를 이루는 구성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게임플레이ludus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서사적’ 플레이와 일탈적 플레이 사이의 충돌을 보다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게임적 서사란 플레이어가 오브젝트(광석, 막대기, 양동이, 지렛대 등...)와 맺는 관계의 양상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탈적 플레이란 무엇일까? 물리엔진의 버그를 활용해 목표를 빠르게 달성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까? 혹은 퍼즐 게임 <Baba Is You>에서처럼, 게임 내에 마련된 메커니즘을 이용해 게임 시스템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경우일까? 이에 대해서는 폭넓은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사물/그림 논쟁과 관련하여 <엘더스크롤: 스카이림>에 등장하는 양동이 오브젝트에 대해서만 덧붙여두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스카이림>에서 양동이는 물을 담거나 나르는 기능조차 없는, 거의 ‘그림’에 가까운 물체였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이 이 작은 오브젝트로도 NPC의 시야를 가릴 수 있음을 발견한 이후, 양동이는 상점 절도에 앞서 주인의 머리에 씌우는 눈가리개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머리에 양동이를 쓴 NPC의 모습은, 이제는 흐릿해진 베데스다의 개발 철학을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애초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그러나 현실의 사물처럼 그럴듯하게 반응하며 현실 효과를 발생시키는 성질을 ‘잔여적 사물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안내된 경로만 따라가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오직 플레이어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다. 물론 이러한 잔여적 사물성은 현실의 물리 법칙을 엄격히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양동이가 모든 감각을 차단한다거나, <배틀그라운드>의 프라이팬이 수류탄의 폭발을 막는 일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그럴듯함plausibility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