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남친은 학살 티라노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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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엄동욱




1984년 뉴욕 한복판. B급 쿵후 영화계의 대스타 류충량John Liu은 뉴욕을 배경으로 쿵후 액션 영화 <뉴욕 닌자>를 연출한다. 그런데 그는 촬영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적해 버리고, 영화는 끝내 완성되지 못한다. 그는 평소 자신이 어느 왕좌의 후계자이며, 무술 경기 챔피언인 데다가 아버지가 NASA의 연구원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기이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영화 오디션과 촬영장으로 여성 배우들을 끌어들여 성매매를 일삼는 조직범죄에 연루된 적이 있고, 구금되었다가 겨우 도망쳤다는 흉흉한 소문도 전해진다. 감독이 사라져 버려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제작사는 이후 여러 문제를 겪다가 결국 파산하고 만다.



유일하게 남겨진 것은 당시 제작사가 파산하면서 버리고 간 영화의 원본 필름 네거티브. 그렇게 35년이란 시간이 그대로 흘렀고, 한 괴짜 배급사가 이것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들의 이름은 ‘필름이 썩는 화학 반응’을 뜻하는 단어인 비네거 신드롬Vinegar Syndrome으로, 심장 병원 이름을 ‘심장 마비’라고 지은 것이나 다름없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B급 쌈마이 영화, 저예산 에로 영화,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을 최고 화질로 복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는 매우 진지한데, 연구소를 차린 뒤 억대 레이저 장비로 4K 복원하고, 자체 수장고에서 수천 편의 필름 릴을 직접 관리한다. 안타깝게도 처음 그들이 <뉴욕 닌자>를 발견했을 당시의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촬영본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대사 트랙, 사운드, 스크립트 등의 자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즉 배우가 무슨 대사를 하는지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한마디로 영화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아예 다시 만들어야 했다.





리니아 퀴글리


신시라 로스록

게다가 원작자는 행방불명인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은 이 작품을 새롭게 만들어보기로 결심한다. 당대 B급 영화 대스타였던 리니아 퀴글리, 신시아 로스록 등을 모조리 섭외한 뒤 새로 더빙했고, 칼이 스치고 옷이 찢기는 미세한 효과음까지 스튜디오에서 다시 녹음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운드트랙도 80년대 영화 특유의 날카로운 아날로그 신스 사운드를 재현하기 위해 밴드 Voyag3r를 섭외하여 새로 구성했다.

더 이상 <뉴욕 닌자>는 미완성된 B급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스포츠 올스타전처럼 80년대 컬트, B급 영화의 아이콘들이 총집합한 새로운 문화 아카이브로 자리매김했고, 예쁘게 다시 태어난 블루레이는 어릴 적 TV로 보고 기억에서 지워버린 장년층 세대의 향수와 컬트 문화를 쫓아다니는 젊은 세대의 수집 욕구를 모두 만족시킨 매력적인 아이템이 되었다. 그렇게 인고의 노력 끝에 완성된 <뉴욕 닌자> 컬렉션은 원작의 숨길 수 없는 저퀄리티와 쿰쿰함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매진되었다.



비네거 신드롬은 사실 <뉴욕 닌자>의 복원 이전부터 이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언젠가 그들은 무명 시절의 폴 워커와 데니스 리차드가 연기한 <타미와 티렉스(1994)>를 복원하려 나섰는데,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가족 영화 등급에 해당하는 PG-13 등급으로 배급된 평범한 B급 코미디물이었다. 한 여학생의 남자 친구가 죽은 뒤 괴짜 과학자가 그의 뇌를 티라노 로봇에 이식해 되살린다는 유치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원본을 조사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 영화가 처음에는 R등급 고어 영화로 촬영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영화의 제작 일화는 이렇다. 텍사스의 한 테마 파크로 보내질 예정이었던 티라노 로봇이 창고에 있었는데, 시간이 몇 주 남자 소유주가 주변의 영화 감독에게 연락해 이 티라노를 가지고 아무 영화나 한번 찍어보자고 말했다. 이 제안을 받고 감독은 대본을 일주일 만에 써냈고, 급하게 무명 배우 몇 명을 섭외해 티라노가 된 남학생이 남자가 죽인 학교 일진들에게 복수하는 스플래터 영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당시 <쥬라기 공원(1993)>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프로듀서가 욕심을 부려 모든 고어 장면을 잘라내고 디즈니스러운 코미디 영화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행히도(?) 비네거 신드롬 덕분에 티라노가 악당의 두개골을 으깨며 창자를 꺼내고, 일진의 고환을 박살 내 버리는 장면은 ‘Gore Cut 4K’ 버전으로 온전히 발매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어릴 때 자신이 본 가족 코미디 망작이 알고 보니 스플래터 영화였다는 점에서 크게 환호했다.


이 외에도 재밌는 작품과 복원 썰은 차고 넘친다. 솔직히 작품 목록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한 헤비메탈 밴드가 어느 마을에 공연하러 갔더니 족장이 돌연변이 좀비 히틀러였다는 내용의 <하드 록 좀비(1985)>, 핵전쟁의 여파로 인류가 불임이 된 미래에서 지구를 침공하는 개구리 인간들로부터 여성을 지키기 위해 지구 유일 번식왕 마초남이 지구를 구하고 여성들을 임신시키는 내용의 <헬 컴즈 투 프로그타운(1988)>, 고무장갑 인형 모양의 유전자 조작 고양이가 생화학 실험실에서 탈출해 초호화 요트에서 사람들을 학살하는 <언인바이티드(1988)> 등등…



비네거 신드롬의 작업을 보다 보면, 세상에는 꼭 숭고한 가치를 지닌 것들만 아카이브로 만들어야 하는 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설사 비천하고 더러운 것일지라도, 그것마저도 남겨야 한다는 확고한 가치 아래에서 여전히 숨겨진 B급 영화 필름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수집 욕구를 자극하는 패키지의 블루레이와 관련 굿즈들을 살펴볼 수 있으니, 취향에 맞게 주워 담아보자.

B급 컬트 영화 배급사 ‘비네거 신드롬’을 소개합니다.

초산염 증후군은 필름이 시간에 지남에 따라 열화하면서 일으키는 화학적 반응을 뜻하는데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비네거 신드롬Vinegar Syndrome은 창고에서 썩어가는 영화들을 고화질로 복원하고, 값비싼 장비들이 놓인 연구소와 수장고를 직접 운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내놓고자 하는 영화는 안타깝게 잊힌 거장들의 숨겨진 걸작이 아니고요. 돌연변이 좀비 히틀러, 전남친의 뇌를 이식한 티라노 로봇, 그리고 개구리 인간에 맞서는 지구 유일의 번식왕 테토남이라고 합니다… 대충 유통기한이 10년쯤 지난 취두부를 에퀴메 그릇에 올려 파는 미슐랭 레스토랑 같은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