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의식의 릴레이, 영화는 어떻게 영원히 꿈꾸는가
WEBZINE
WEDITOR 고혁민
WEDITOR 고혁민
*<블루 벨벳(1986)>과 <스콜피오 라이징(1963)>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6년 9월, 데이비드 린치의 네 번째 장편 영화 <블루 벨벳>이 미국 현지에서 개봉했다. 미 전역을 다 합쳐도 개봉한 극장이 98개밖에 되지 않는, 그마저도 뉴욕과 LA 등 대도시 아트하우스관이 대부분이었던 한정 개봉이었다. 개봉 직후 주류 비평계의 분위기는 완전히 엇갈렸다. 『뉴요커』의 폴린 카엘은 "미국 영화가 도달한 가장 놀라운 초현실주의적 걸작"이라며 극찬했다. 반면, 당대의 가장 대중적인 권위를 누린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린치가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가학적으로 착취했다며 "역겹고 끔찍한 영화"라고 비판했다(별 4개 만점에 별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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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비평계가 이렇게 치고받는 사이, J. 호버먼을 필두로 한 『빌리지 보이스』나 『필름 코멘트』 같은 대안 매체의 지식인들과 전위 예술 평론가들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곳을 향했다. 그들은 여주인공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60년대 히트곡인 바비 빈튼의 “Blue Velvet”을 부르고, 데니스 호퍼가 가학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6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장악한 전설적인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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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앵거의 28분짜리 단편 <스콜피오 라이징(1963)>은 가죽 재킷을 입은 폭주족들의 마초적인 서브컬처와 나치 기호, 오컬트 이미지를 대사 없이 파편적으로 이어 붙인 몽타주 영화다. 당대 미국 백인 중산층이 소비하던 달콤하고 건전한 팝송들을 기괴하고 폭력적인 몽타주 위에 얹는 방식으로 주류 할리우드를 조롱한 이 작품은 훗날 1980~90년대를 휩쓸게 되는 MTV식 뮤직비디오 미학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사운드트랙이 바로 바비 빈튼의 'Blue Velvet'이다. 그래서 언더 문화에 익숙한 평론가들은 <블루 벨벳>을 직접 보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도 린치와 앵거의 미학적 연결 지점을 논하기 시작했다. <블루 벨벳>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Blue Velvet”이 흘러나오고, 무엇보다 영화 초중반, 린치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힐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직접 그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며 평론가들은 린치가 앵거의 연출을 레퍼런스 삼은 게 분명하다고 단정 지었다.
*<스콜피오 라이징>을 비롯한 케네스 앵거의 작품 대부분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대부분 단편이라 러닝타임도 짧으니 한 번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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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린치 본인은 <스콜피오 라이징>이 <블루 벨벳>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언제나 확고하게 부정했다. 1986년 개봉 직후 인터뷰에서 린치는 "나는 다른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내 모든 아이디어는 명상과 꿈에서 무작위로 낚아 올린 것일 뿐이다"라며 우회적으로 의혹을 일축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블루 벨벳>이 명실상부한 컬트의 만신전에 오른 1990년대 중반, 린치와 밀착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내용을 『Lynch on Lynch』라는 책으로 펴낸 작가 크리스 로들리와의 대담에서 린치는 "나는 <블루 벨벳>을 만들기 전에는 <스콜피오 라이징>을 보지 못했다"며 더욱 확실하게 부정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블루 벨벳>은 세 가지 조각에서 출발했다. 첫째는 바비 빈튼의 노래 'Blue Velvet'이 주는 어떤 기분이었다. 두 번째로 떠오른 것은 귀였다. 푸른 들판에 버려진 잘린 귀여야만 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밤에 몰래 어떤 여자의 방에 숨어 들어가 그녀를 지켜보고 싶다는 나의 오랜 판타지였다." <블루 벨벳>은 린치 자신의 개인적인 조각에서 출발한 것이지, 앵거의 전설적인 단편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다른 감독이라면 이 말을 믿고 넘어가겠지만, 워낙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방어적 페르소나와 신비주의로 일관하던 린치였기에, <스콜피오 라이징>을 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당시 상황을 우회적으로 재구성해 보며 린치의 부정이 과연 타당한지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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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건 1963년 10월 29일, 뉴욕의 그래머시 아트 극장에서였다. 이날의 상영으로 뉴욕 언더그라운드 예술계는 그야말로 광기에 휩싸였다. 입소문을 타고 인근의 다른 극장에서도 상영되기 시작했는데,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블리커 스트리트 시네마에서는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또 다른 전설인 요나스 메카스의 전위 영화 <더 브릭The Brig>과 동시 상영되며 극장 밖으로 블록을 한 바퀴 감쌀 정도로 거대한 관객 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뉴욕에서 상영을 점차 늘려가던 <스콜피오 라이징>은 1963년 겨울을 지나 LA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 3월, 미국 전위 영화계의 흐름을 바꿔놓는 대사건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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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7일, LA 웨스턴 애비뉴에 위치한 '시네마 극장'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Knife in the Water>을 메인으로 상영 중이었고, <스콜피오 라이징>은 그 앞에 배치된 오프닝 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상영실을 급습하고는 영사기를 세운 뒤 <스콜피오 라이징>의 필름 프린트를 전격 압수했다. 이날 현장에서 극장 매니저였던 23세의 마이크 게츠(Mike Getz)가 '공공장소에서의 외설물 상영'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경찰의 이번 급습은 미국 나치당 소속 당원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시민이 "국기를 모독하고 동성애적 난교를 묘사하는 불온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며 당국에 고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어진 재판에서 워렌 울프 검사는 이 영화의 동성애적 코드와 가죽 재킷을 입은 폭주족들의 묘사가 "명백히 타락한 행위의 전시"라고 주장했으며, 특히 영화 중간에 짧게 스쳐 지나가는 남성의 나체 프레임을 결정적인 외설의 증거로 삼았다. 1심 판사는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고, 매니저 마이크 게츠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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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명백히 전국적인 이슈였다. 같은 대형 보수 일간지는 이 사건을 일종의 '풍기문란 범죄' 가십처럼 다루었다. 반면 요나스 메카스가 활동하던 뉴욕의 『빌리지 보이스』 같은 대안 매체에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짓밟는 국가적 폭력'이었다. 이들은 공권력의 검열을 맹비난하며 연일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결국 같은 해 12월, 캘리포니아 대법원이 1심을 뒤집고 마이크 게츠와 영화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이 영화가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며 '구제할 만한 사회적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이 판결로 인해 <스콜피오 라이징>은 하나의 전설이 된다. 판결 자체가 이 광기 어린 전위 영화에 대한 거대한 노이즈 마케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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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우리의 린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스콜피오 라이징>이 처음 상영된 63년 늦가을에서 LA 경찰의 필름 압수 사태가 벌어진 1964년 봄까지, 린치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프랜시스 C. 해먼드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오직 화가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1964년 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린치는, 그해 가을 보스턴에 있는 보스턴 미술관 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이곳의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자퇴해 버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린치는 영화와 아주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고, <스콜피오 라이징> 같은 전위 영화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1965년,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린치는 예술 인생에서 완전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공포와 폭력의 도시였던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서 그는 영상 매체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1967년 마침내 첫 단편 영화 <여섯 명의 아픈 남자들>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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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LA 필름 압수 사태 때 체포된 극장 매니저 마이크 게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끌고 와보자. 그는 그냥 평범한 극장 매니저나 알바가 아니었다. 그는 1963년부터 'Movies 'Round Midnight'이라는 심야 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해 앤디 워홀, 스탠 브래키지 같은 전위 예술가들의 필름을 틀어왔다. 할리우드의 한복판인 LA에서 이 극장은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과 히피, 시네필들의 집결지였다.
그러다 64년 3월에 체포된 후로 법정공방 끝에 같은 해 12월에 무죄 판결을 받은 게츠는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12’라는 전국적인 심야 상영 투어 프로그램을 조직했다. 뉴욕과 LA 등 일부 대도시에 갇혀 있던 <스콜피오 라이징> 같은 전위 영화들을 일리노이, 콜로라도, 텍사스 등 미 전역의 대학가와 지역 예술 극장으로 퍼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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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린치가 살던 필라델피아도 게츠의 영화 공급망 안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린치가 다니던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는 인근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위 예술 담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고, 케네스 앵거의 영향력은 이곳에서 절대적이었다. 같은 지역은 아니었으나 뉴욕에서 영화를 배우던 마틴 스콜세지도 훗날 자신의 출세작인 <비열한 거리>가 명백히 케네스 앵거의 영향 아래 있다고 고백했으며, 수많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이 앵거를 추켜세웠다.
심지어 이때 린치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미술보다 영상 예술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여러모로 <스콜피오 라이징>을 접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환경이었고, 설령 보지 않았더라도 어떤 작품인지는 인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이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건 린치 특유의 기믹이었을까, 아니면 주변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오직 내면에만 침잠하는 자폐적 예술가였기 때문일까? 많은 비평가는 전자로 추정한다. 그러나 제3의 시각도 존재하는데, 이 글의 남은 부분에서는 바로 그 시각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사실 바비 빈튼의 “Blue Velvet”이 두 영화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이 점은 린치에게 확실한 변명거리이자 알리바이가 되어 준다. <스콜피오 라이징>에서 앵거는 이 팝송을 가죽 재킷 입은 퀴어 폭주족들의 마초적 이미지 위에 얹어 백인 중산층의 위선적인 정상성을 외부에서 대놓고 조롱한다. 반면 <블루 벨벳>은 이 팝송을 완전히 내면화한 것처럼 보인다. 앵거에게 이 곡이 일종의 도구였다면, 린치에게 이 곡은 자신이 직접 메스를 대고 해부해야 할 백인 중산층의 기만적인 구조 그 자체였다. 린치가 진정으로 관심 있었던 건 하위 문화와 메가 히트곡의 충돌이 아니라, 'Blue Velvet'이 상징하는 미국 사회의 매끄러운 표면 아래 들끓는 원초적 폭력성이었다. 린치가 앵거의 연출 방법론을 그대로 끌고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블루 벨벳>의 미학적 뿌리에는 분명히 <스콜피오 라이징>이 존재한다. 린치의 의도와 상관없이, 두 영화를 모두 본 관객이라면 분명히 공명하는 지점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게 될 것이다. 필자에게 그것은 바로 ‘미국적인 것의 확장’이다. 이 광기 어린 두 감독은 미국의 하얀 울타리와 대중문화에 그저 심술이 나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파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국 사회 내부에 억눌려 있던 기괴함과 불온함마저 ‘미국 영화’가 포섭할 수 있는 거대한 영토로 편입시켰다. <블루 벨벳>의 오프닝에서 푸른 잔디밭을 비추던 카메라가 땅 밑으로 파고들어 우글거리는 딱정벌레 떼를 포착하는 그 섬뜩한 매크로 샷. 그런 것들조차 ‘미국적인 것’ 혹은 ‘미국 영화적인 것’의 일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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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케네스 앵거는 <스콜피오 라이징>의 불온함을 이유로 경찰에 필름을 압수당했다. 반면 데이비드 린치는 <블루 벨벳>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다. 린치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인 <엘리펀트 맨>이 아카데미 총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지 모르나, <블루 벨벳>의 미학적 뿌리가 (린치가 이를 의식했든 아니든) <스콜피오 라이징>에 닿아 있음을 감안하면 단 한 부문에라도 노미네이트된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두 사건 사이에는 23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불온함과 반문화의 상징이 필름 느와르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상업 장르의 외피 속에 매끄럽게 숨어들어 아카데미에 입성하기까지 그만큼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이 과정 자체가 필자에게는 아방가르드가 대중문화로 수용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로 다가온다.
이제 앞서 언급한 제3의 시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린치가 <스콜피오 라이징>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대의 맥락을 재구성해 본다면 전자가 유력해 보이고, 사실 그 미스터리야말로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동력이었다. 그러나 <블루 벨벳>과 린치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진실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본질은 케네스 앵거가 필름에 새겨 넣은 불온함과 기이함의 씨앗이 미국 예술계 전반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형성된 기류가 결국 린치에게 가닿았다는 사실이다. 린치가 'Blue Velvet'을 듣고 느꼈다던 그 특유의 기분은 당대의 사회적 공기와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영화가 공명하는 지점을 보고 있으면 이를 '시대적 무의식'이라고도 부르고 싶어진다. 이전 시대의 반항아가 심어 놓은 컬트의 씨앗이 다음 시대의 그 못지않은 이단아에게 전해졌고, 그 이단아는 이제 '컬트의 신'이라 불린다.
린치는 언제나 영화를 꿈에 비유하곤 했다. 한 시대의 억눌린 텍스트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를 건너뛰고 매체를 숙주 삼아 다음 창작자의 기분과 직관으로 전염되는 무의식의 릴레이를 이어간다. 앵거의 마법이 린치의 푸른 벨벳 아래로 스며들었듯, 영화라는 이 기괴하고 매혹적인 악몽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1986년 9월, 데이비드 린치의 네 번째 장편 영화 <블루 벨벳>이 미국 현지에서 개봉했다. 미 전역을 다 합쳐도 개봉한 극장이 98개밖에 되지 않는, 그마저도 뉴욕과 LA 등 대도시 아트하우스관이 대부분이었던 한정 개봉이었다. 개봉 직후 주류 비평계의 분위기는 완전히 엇갈렸다. 『뉴요커』의 폴린 카엘은 "미국 영화가 도달한 가장 놀라운 초현실주의적 걸작"이라며 극찬했다. 반면, 당대의 가장 대중적인 권위를 누린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린치가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가학적으로 착취했다며 "역겹고 끔찍한 영화"라고 비판했다(별 4개 만점에 별 1개).

주류 비평계가 이렇게 치고받는 사이, J. 호버먼을 필두로 한 『빌리지 보이스』나 『필름 코멘트』 같은 대안 매체의 지식인들과 전위 예술 평론가들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곳을 향했다. 그들은 여주인공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60년대 히트곡인 바비 빈튼의 “Blue Velvet”을 부르고, 데니스 호퍼가 가학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6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장악한 전설적인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케네스 앵거의 28분짜리 단편 <스콜피오 라이징(1963)>은 가죽 재킷을 입은 폭주족들의 마초적인 서브컬처와 나치 기호, 오컬트 이미지를 대사 없이 파편적으로 이어 붙인 몽타주 영화다. 당대 미국 백인 중산층이 소비하던 달콤하고 건전한 팝송들을 기괴하고 폭력적인 몽타주 위에 얹는 방식으로 주류 할리우드를 조롱한 이 작품은 훗날 1980~90년대를 휩쓸게 되는 MTV식 뮤직비디오 미학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사운드트랙이 바로 바비 빈튼의 'Blue Velvet'이다. 그래서 언더 문화에 익숙한 평론가들은 <블루 벨벳>을 직접 보기도 전에 제목만 보고도 린치와 앵거의 미학적 연결 지점을 논하기 시작했다. <블루 벨벳>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Blue Velvet”이 흘러나오고, 무엇보다 영화 초중반, 린치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힐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직접 그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며 평론가들은 린치가 앵거의 연출을 레퍼런스 삼은 게 분명하다고 단정 지었다.
*<스콜피오 라이징>을 비롯한 케네스 앵거의 작품 대부분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대부분 단편이라 러닝타임도 짧으니 한 번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 정작 린치 본인은 <스콜피오 라이징>이 <블루 벨벳>에 미친 영향에 대해 언제나 확고하게 부정했다. 1986년 개봉 직후 인터뷰에서 린치는 "나는 다른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내 모든 아이디어는 명상과 꿈에서 무작위로 낚아 올린 것일 뿐이다"라며 우회적으로 의혹을 일축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블루 벨벳>이 명실상부한 컬트의 만신전에 오른 1990년대 중반, 린치와 밀착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내용을 『Lynch on Lynch』라는 책으로 펴낸 작가 크리스 로들리와의 대담에서 린치는 "나는 <블루 벨벳>을 만들기 전에는 <스콜피오 라이징>을 보지 못했다"며 더욱 확실하게 부정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블루 벨벳>은 세 가지 조각에서 출발했다. 첫째는 바비 빈튼의 노래 'Blue Velvet'이 주는 어떤 기분이었다. 두 번째로 떠오른 것은 귀였다. 푸른 들판에 버려진 잘린 귀여야만 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밤에 몰래 어떤 여자의 방에 숨어 들어가 그녀를 지켜보고 싶다는 나의 오랜 판타지였다." <블루 벨벳>은 린치 자신의 개인적인 조각에서 출발한 것이지, 앵거의 전설적인 단편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다른 감독이라면 이 말을 믿고 넘어가겠지만, 워낙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방어적 페르소나와 신비주의로 일관하던 린치였기에, <스콜피오 라이징>을 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당시 상황을 우회적으로 재구성해 보며 린치의 부정이 과연 타당한지 검토해 보자.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이 세상에 처음 공개된 건 1963년 10월 29일, 뉴욕의 그래머시 아트 극장에서였다. 이날의 상영으로 뉴욕 언더그라운드 예술계는 그야말로 광기에 휩싸였다. 입소문을 타고 인근의 다른 극장에서도 상영되기 시작했는데,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블리커 스트리트 시네마에서는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또 다른 전설인 요나스 메카스의 전위 영화 <더 브릭The Brig>과 동시 상영되며 극장 밖으로 블록을 한 바퀴 감쌀 정도로 거대한 관객 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뉴욕에서 상영을 점차 늘려가던 <스콜피오 라이징>은 1963년 겨울을 지나 LA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 3월, 미국 전위 영화계의 흐름을 바꿔놓는 대사건이 터진다.

1964년 3월 7일, LA 웨스턴 애비뉴에 위치한 '시네마 극장'에서는 로만 폴란스키의 <물속의 칼Knife in the Water>을 메인으로 상영 중이었고, <스콜피오 라이징>은 그 앞에 배치된 오프닝 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상영실을 급습하고는 영사기를 세운 뒤 <스콜피오 라이징>의 필름 프린트를 전격 압수했다. 이날 현장에서 극장 매니저였던 23세의 마이크 게츠(Mike Getz)가 '공공장소에서의 외설물 상영'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경찰의 이번 급습은 미국 나치당 소속 당원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시민이 "국기를 모독하고 동성애적 난교를 묘사하는 불온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며 당국에 고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어진 재판에서 워렌 울프 검사는 이 영화의 동성애적 코드와 가죽 재킷을 입은 폭주족들의 묘사가 "명백히 타락한 행위의 전시"라고 주장했으며, 특히 영화 중간에 짧게 스쳐 지나가는 남성의 나체 프레임을 결정적인 외설의 증거로 삼았다. 1심 판사는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고, 매니저 마이크 게츠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명백히 전국적인 이슈였다.
결국 같은 해 12월, 캘리포니아 대법원이 1심을 뒤집고 마이크 게츠와 영화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이 영화가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며 '구제할 만한 사회적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이 판결로 인해 <스콜피오 라이징>은 하나의 전설이 된다. 판결 자체가 이 광기 어린 전위 영화에 대한 거대한 노이즈 마케팅이 된 것이다.

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우리의 린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스콜피오 라이징>이 처음 상영된 63년 늦가을에서 LA 경찰의 필름 압수 사태가 벌어진 1964년 봄까지, 린치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프랜시스 C. 해먼드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오직 화가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1964년 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린치는, 그해 가을 보스턴에 있는 보스턴 미술관 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이곳의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자퇴해 버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린치는 영화와 아주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고, <스콜피오 라이징> 같은 전위 영화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1965년,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린치는 예술 인생에서 완전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공포와 폭력의 도시였던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서 그는 영상 매체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1967년 마침내 첫 단편 영화 <여섯 명의 아픈 남자들>을 완성한다.

그러다 64년 3월에 체포된 후로 법정공방 끝에 같은 해 12월에 무죄 판결을 받은 게츠는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12’라는 전국적인 심야 상영 투어 프로그램을 조직했다. 뉴욕과 LA 등 일부 대도시에 갇혀 있던 <스콜피오 라이징> 같은 전위 영화들을 일리노이, 콜로라도, 텍사스 등 미 전역의 대학가와 지역 예술 극장으로 퍼트린 것이다.

당연히 린치가 살던 필라델피아도 게츠의 영화 공급망 안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린치가 다니던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는 인근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위 예술 담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고, 케네스 앵거의 영향력은 이곳에서 절대적이었다. 같은 지역은 아니었으나 뉴욕에서 영화를 배우던 마틴 스콜세지도 훗날 자신의 출세작인 <비열한 거리>가 명백히 케네스 앵거의 영향 아래 있다고 고백했으며, 수많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이 앵거를 추켜세웠다.
심지어 이때 린치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미술보다 영상 예술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여러모로 <스콜피오 라이징>을 접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환경이었고, 설령 보지 않았더라도 어떤 작품인지는 인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이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건 린치 특유의 기믹이었을까, 아니면 주변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오직 내면에만 침잠하는 자폐적 예술가였기 때문일까? 많은 비평가는 전자로 추정한다. 그러나 제3의 시각도 존재하는데, 이 글의 남은 부분에서는 바로 그 시각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사실 바비 빈튼의 “Blue Velvet”이 두 영화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이 점은 린치에게 확실한 변명거리이자 알리바이가 되어 준다. <스콜피오 라이징>에서 앵거는 이 팝송을 가죽 재킷 입은 퀴어 폭주족들의 마초적 이미지 위에 얹어 백인 중산층의 위선적인 정상성을 외부에서 대놓고 조롱한다. 반면 <블루 벨벳>은 이 팝송을 완전히 내면화한 것처럼 보인다. 앵거에게 이 곡이 일종의 도구였다면, 린치에게 이 곡은 자신이 직접 메스를 대고 해부해야 할 백인 중산층의 기만적인 구조 그 자체였다. 린치가 진정으로 관심 있었던 건 하위 문화와 메가 히트곡의 충돌이 아니라, 'Blue Velvet'이 상징하는 미국 사회의 매끄러운 표면 아래 들끓는 원초적 폭력성이었다. 린치가 앵거의 연출 방법론을 그대로 끌고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블루 벨벳>의 미학적 뿌리에는 분명히 <스콜피오 라이징>이 존재한다. 린치의 의도와 상관없이, 두 영화를 모두 본 관객이라면 분명히 공명하는 지점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게 될 것이다. 필자에게 그것은 바로 ‘미국적인 것의 확장’이다. 이 광기 어린 두 감독은 미국의 하얀 울타리와 대중문화에 그저 심술이 나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파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국 사회 내부에 억눌려 있던 기괴함과 불온함마저 ‘미국 영화’가 포섭할 수 있는 거대한 영토로 편입시켰다. <블루 벨벳>의 오프닝에서 푸른 잔디밭을 비추던 카메라가 땅 밑으로 파고들어 우글거리는 딱정벌레 떼를 포착하는 그 섬뜩한 매크로 샷. 그런 것들조차 ‘미국적인 것’ 혹은 ‘미국 영화적인 것’의 일부가 된 것이다.

1963년, 케네스 앵거는 <스콜피오 라이징>의 불온함을 이유로 경찰에 필름을 압수당했다. 반면 데이비드 린치는 <블루 벨벳>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다. 린치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인 <엘리펀트 맨>이 아카데미 총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지 모르나, <블루 벨벳>의 미학적 뿌리가 (린치가 이를 의식했든 아니든) <스콜피오 라이징>에 닿아 있음을 감안하면 단 한 부문에라도 노미네이트된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두 사건 사이에는 23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불온함과 반문화의 상징이 필름 느와르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상업 장르의 외피 속에 매끄럽게 숨어들어 아카데미에 입성하기까지 그만큼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이 과정 자체가 필자에게는 아방가르드가 대중문화로 수용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로 다가온다.
이제 앞서 언급한 제3의 시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린치가 <스콜피오 라이징>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대의 맥락을 재구성해 본다면 전자가 유력해 보이고, 사실 그 미스터리야말로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동력이었다. 그러나 <블루 벨벳>과 린치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진실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본질은 케네스 앵거가 필름에 새겨 넣은 불온함과 기이함의 씨앗이 미국 예술계 전반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형성된 기류가 결국 린치에게 가닿았다는 사실이다. 린치가 'Blue Velvet'을 듣고 느꼈다던 그 특유의 기분은 당대의 사회적 공기와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영화가 공명하는 지점을 보고 있으면 이를 '시대적 무의식'이라고도 부르고 싶어진다. 이전 시대의 반항아가 심어 놓은 컬트의 씨앗이 다음 시대의 그 못지않은 이단아에게 전해졌고, 그 이단아는 이제 '컬트의 신'이라 불린다.
린치는 언제나 영화를 꿈에 비유하곤 했다. 한 시대의 억눌린 텍스트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를 건너뛰고 매체를 숙주 삼아 다음 창작자의 기분과 직관으로 전염되는 무의식의 릴레이를 이어간다. 앵거의 마법이 린치의 푸른 벨벳 아래로 스며들었듯, 영화라는 이 기괴하고 매혹적인 악몽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