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으로 향하는 여정의 종착지에는
WEBZINE
WEDITOR   이시연


영화관의 불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레 이 영화가 말하는 바에 대한 질문을 가진다. 하지만 이번 한국영상자료원의 기획전 ‘트립 시네마: 물질, 접속, 조립’은 그보다 앞선, 더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에서 시작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해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왔던 현실의 토대를 뒤흔들기 위한 선언처럼 보인다. 본 기획전은 20편의 상영작을 통해 우리를 그 낯설고도 치명적인 여정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다.

흔히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교훈을 얻거나 시각적 유희를 즐기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트립 시네마’가 제안하고자 하는 체험은 그 궤를 달리한다. 여기서 영화는 안락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 체계를 전복시키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이미지, 우리의 감각을 물리적으로 타격하는 사운드, 그리고 긴 러닝타임 끝에 도달하는 탈진 상태. 이 여정의 종착지는 매혹적이라기보다 차라리 흉포함에 가까운 미지의 자극을 마주하는 일이다.

아마 이번 기획전에 ‘트립’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을 낯선 세계로 데려가는 매체”이기 때문일 테다. 선정된 상영작들은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는 불가능할 만큼 다채롭다. ‘트립 시네마’는 1960년에서 그 여정을 시작한다.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확산된 반문화는 기존 사회가 견고히 유지하던 관습과 정의에 반기를 들며 등장했다. 억압된 성의 해방, 약물을 통한 새로운 의식의 탐구, 기성 권력에 대한 저항. 그 확산 속에서 여러 약물의 사용이 퍼지게 되었고, 새로운 의식의 문을 두드리는 이 시도는 영화라는 매체와 강렬히 공명했다.스크린은 환각의 감각을 시각화하는 가장 완벽한 매체가 되었고, ‘트립 시네마’는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의 의식이 외부의 자극에 의해 붕괴하고 재편되었던 계보 위에 서 있다.

이제 그로부터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성의 해방, 전복, 약물, 표출. 여러 방법을 통해 ‘새로운 인간’을 꿈꿨던 시도는 결국 실패한 듯 보인다. 그러나 감각을 뒤흔들고자 하는 욕망은 형태를 바꾸어 더욱 교묘한 방식을 택하며 우리 삶에 침투해 있다. 마크 피셔가 지적했듯, 현대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잉 자극 속에서 역설적으로 ‘감각의 마비’를 겪는다. 자극은 곳곳에 널려 있으나 정작 그 무엇도 깊이 느끼지 못하는 모순된 질병. ‘트립 시네마’는 이 지점에서 다시 의미를 가진다. 이 기획전은 그저 자극적이기만 한 영화들의 나열이 아니라, 마비된 감각을 억지로 깨우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혼란스러운 환경을 다시금 응시하게 만드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본 기획전은 외부의 물질이 내면으로 침투해 지각을 흔드는 ‘물질’, 인간이 신매체와 결합해 신체와 의식이 변형되는 ‘접속’, 그리고 스크린 자체가 감각을 새로이 만들고 재배열시키는 ‘조립’이라는 세 가지 여정으로 구성된다. ‘트립 시네마’는 고요하고 어두운 상영관에서 마비된 우리의 감각을 억지로 뒤흔들어 깨운다. 그러한 불편한 경험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혼란스러운 환경을 새롭게 지각하도록 만드는 시도처럼 다가온다.



기획전의 주제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 각 섹션에 해당하는 영화를 예시로 들어 소개하는 방법 역시 있겠지만 이 세 개로 나뉜 섹션 역시 하나의 ‘트립’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 물질-접속-조립의 한 개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 기획전이 내포한 의미를 파악하기에 가장 필수적인 방법이 아닐까. 따라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두 영화, 〈비디오드롬(1983)〉과 〈엑시스텐즈(1999)〉를 이 흐름의 중심축으로 삼기로 했다. 두 작품 모두 ‘접속’ 섹션에 선정되었지만, 앞서 말한 물질-접속-조립을 통하는 여정의 세 단계를 동시에 품고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니까.


물질의 단계에서 여정은 차례대로 시작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통으로 드러나는 ‘삽입’의 묘사다. 〈비디오드롬〉에서는 주인공 맥스(제임스 우즈 분)의 복부에 구멍이 생겨 그 속에 비디오테이프가 밀어 넣어진다. 〈엑시스텐즈〉는 그만큼 그로테스크한 폭력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척추에 게임포트를 연결하는 설정이 영화 세계관의 핵심을 이룬다. 물질 섹션의 주제라 볼 수 있는 ‘외부의 물질이 신체를 관통해 내면으로 침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크로넨버그는 ‘물질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지각을 교란한다’는 핵심적 명제를 육체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 침투는 다음 단계인 ‘접속’으로 이어진다. 비디오드롬의 신호에 동화된 맥스는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잃으며 점차 자아마저 흐릿해진다. 하나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처럼 변모한 그에게 주체성이란 이미 환상이 되었다. 〈엑시스텐즈〉의 인물들은 게임 속에 접속하는 순간 현실과 가상의 층위를 분간하지 못한다. 80년대의 텔레비전과 비디오, 세기말이 상상해 낸 증강현실 게임포트. 감독은 똑같은 결론을 도출해 낸다.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그것을 손에 쥔 주체의 신체와 의식을 잠식한다. 진실과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도구에 이용당하는 객체로 재배열된다.



이렇게 침투당하고 변형된 그들은 여정의 마지막인 ‘조립’으로 향한다. 맥스의 신체는 비디오와 뒤엉키며 새로운 육체의 탄생을 선언한다. 〈엑시스텐즈〉에서 현실은 여러 겹으로 쌓이며 마치 끊임없는 꿈에 갇힌 듯 재구성된다. 두 작품에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묻는 것은 점차 무의미해진다.
이 생각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기획전이 처음으로 던진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애초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해답을 스스로 도출하게 된다. 이게 바로 이번 여정의 종착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