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우리디케를 마주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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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방한결
WEDITOR 방한결

오르페우스의 연인 에우리디케가 저승으로 끌려가고, 하데스는 “왔던 길로 돌아가라. 그러면 에우리디케도 따라갈 것이다. 하지만 저승의 문을 통과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뒤돌아보면 그녀는 영원히 이곳에 남게 될 것이다”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긴 여정 동안 에우리디케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내 뒤를 돌아보고 만다.
클로이 자오의 <햄넷(2025)>에는 빈번히 전지적 시점이 등장한다. 카메라가 하늘에서 인물을 내려다본다. 이 쇼트들은 상당한 불편함을 유발한다. 그러한 쇼트는 두 주인공 아녜스와 윌의 시점이 매우 불평등하게 담겨 있는 것과는 상이하게 이야기 전체를 컨트롤하는 미지의 힘을 담고 있다. 햄넷을 잃은 것은 아녜스와 윌 모두지만 관객은 아녜스의 울부짖음만을 볼 수 있다. 윌이 슬퍼하는 장면은 커녕 그가 계속해왔던 연극 작업 조차 어떤 과정을 지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때 모든 것을 조망하는 시점이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자오가 왜 이 거대 시점을 넣은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비극적 사건의 상이한 무게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부터 출발해 보고자 한다.

카메라를 하늘에 두었을 때 벌어지는 일들, 자오는 연극 무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영화에서 찾는다. 일반적인 연극의 무대라면 공간의 낭비라고 생각했을 법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사선으로 나오거나 굽혀진 장소들은 인물 간의 시선에 따른 사각지대를 창조한다. 이로써 두 인물은 여전히 관객에게 관찰되지만 서로를 볼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놓인다. 인물과 관객 사이의 시각적 간극의 탄생은 서두에 언급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관계와 닮아있다. 오르페우스를 보고 있는 에우리디케, 한 쪽의 시점이 전적으로 우세하다. 신화에서의 에우리디케처럼 관객은 아무 말도, 아무런 손짓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또 하나의 관객, 연극을 바라보는 아녜스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자오의 기획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에우리디케를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고 비극을 재경험하게 만든다. 에우리디케는 이제 가장 능동적인 관객이 되었다.


<햄넷>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은 윌이 창문을 보고 사랑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연인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심문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지만,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는 윌의 쇼트와 산 속에 있는 아녜스를 담은 장면들은 아무런 연결점 없이 이어져 있다. 가장 첫 시퀀스인 이 장면들은 바깥과 실내라는 각자의 무대를 창조하는 동시에 그 둘에 대한 긴밀한 관계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문, 창문, 나무의 터널, 연극의 뒷편 등 무언가 뚫린 지점이지만 끝맺어지지 않는 미완의 공간이 <햄넷>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끝맺어지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햄릿의 초연에서 아녜스와 연극 배우가 손을 잡는 순간이다.



그간 아녜스와 윌의 시련은 서로가 물리적으로 멀어져야 한다고 믿거나, 혹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다른 공간에 있는 것으로부터 형성되었다. 결혼 후 그들의 영역은 구분되지 못하고 하나가 역전되거나 하나의 자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무한한 통로만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혹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멀리 왔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햄넷의 죽음과 교차되는 말을 탄 윌의 쇼트들을 떠올려 보라. 영원한 운동은 윌을 겁먹게 만들었다. 실상 그것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물과도 같아서 대면하여 헤엄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그 공백의 존재를 우회하여 인정한다. 이제 문은 뒤에 있다. 연극을 준비하는 쇼트에서는 없었으나 초연의 무대에서는 배우가 드나드는 구멍이 있다. 구멍을 뒤에 두고 앞을 본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본다. 이로써 비극이 마무리된다.

연극과 영화를 구분하는 공교로운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시간적 현현이었다. 일시적인 성격을 지닌 연극, 보존의 조건만 잘 갖춰진다면 영원히 남아 있는 영화. 하지만 영화에 대해 ‘연극적’이라고 부르는 표현은 적지 않게 관찰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연극적 감독은 홍상수다. <하하하(2010)>, <해변의 여인(2006)>, <옥희의 영화(2010)> 등 그의 중기 부분에 속한 희극들은 서사를 견인하는 그 에너지를 유령적인 배역으로부터 만들어 낸다. 같은 여자를 생각하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두 남자, 혹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하는 여자들. 그들을 나란히 대볼 수 있지만 의미는 계속해서 덧씌워지고 이내 새로워진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연극적이다. 영화의 역사를 뛰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온 서사, 그리고 배역에 여러 인물이 들어갔다가 나온다. 어쩌면 진정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연극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연극의 배역은 그 자체로 공백을 가진다. 수많은 사람이 쓰고 벗은 외피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자리한다. 쌍둥이 햄넷과 메리의 장난과도 같다. 아이들의 역할놀이가 없었다면, 햄넷이 메리와 자리를 바꿀 수 있었을까? 단순한 바꿔치기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 부딪히는 나와 배역의 내부들. 어쩌면 연극은 죽음까지도 대신 맞이하는 엄청난 것일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연극의 외피들은 서사를 결여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햄넷> 속의 많은 인물들이 복잡한 사정을 줄줄이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결여가 타인과 만나는 공백을 만들어 낸다. 나와 저것은 분명 다른 곳에 있지만, 우리는 마주보고 있다. 그것이 <햄넷>이 비극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아녜스는 에우리디케가 하지 못했던 말, ‘뒤를 돌아봐’를 내뱉는다. 아녜스가 에우리디케와 마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