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브레송 필모그래피 티어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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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고혁민
WEDITOR 고혁민
처음으로 본 브레송의 영화는 〈몽상가의 나흘밤〉이었지만 그의 영화와 처음으로 공명한 순간은 작년 늦가을 서울아트하우스영화제에서 〈소매치기〉를 봤을 때였다. 이 영화가 나에게 준 미학적 충격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커서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마침 3월 말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네마토그래프의 비밀스러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로베르 브레송 회고전이 열렸고 몇 작품들을 추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후 확인하지 못했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장편 13편을 모두 감상하게 되었고 브레송은 내 마음속에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위대한 프랑스 감독에 대해 감독론을 쓰고 싶었지만 나에겐 아직 그럴 만한 식견이 없기에, 티어메이커라는 조잡한 형식을 빌려 그의 작품 세계와 개별 작품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한다. 솔직히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 SSS를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래도 기왕 순위를 매기기로 했으면 과몰입해서 제대로 해야 한다. 가장 사랑하는 네 작품에 대해서는 S 위에 SSS 티어를 두는 반칙을 썼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긴 하지만 브레송 영화에 스포일러 경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여러분들은 나와 아주 다르게 그 영화들을 볼 것이고 더 훌륭한 비평 지점들을 발견해 낼 테니. 철저하게 에디터의 개인적인 순위이며 짧은 감상을 덧붙인다.
1. 〈소매치기〉, Pickpocket, 1959
Tier: SSS / 5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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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삶의 영적인 열등성에 관한 시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브레송의 최고작이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었던 사람이 다시 사회로 편입되는 과정에 대한 심리적인 연대기인 이 영화는 시작부터 비범하다. 제목이 소매치기인데 범죄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나올 내용이 허구이며 더 나아가 이 모든 내용이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심리적으로 전개되는 상상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한다. 이 오프닝이 매혹적인 이유는 개인의 심리적 삶에는 어떤 영적인 열등성이 존재한다는 걸 일깨워줘서이지 않을까? 우리의 영혼은 영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열등하기도 하다는 점. 우린 언제나 범죄로 이어지는 위험한 망상을 하기 십상이며 나쁜 짓을 하면서도 당당히 구원을 구걸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나는 특별하다는 자각 때문에 모든 도덕과 법 체계를 적어도 자신의 내면 세계 안에서는 완전히 무너뜨리고 이상한 망상을 이어간다는 점. 어쩌면 브레송의 〈소매치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일 수도 있겠다. 삶의 영적인 열등성을 인식한 사회 바깥의 존재가 소매치기라는 범죄 행위에 집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윤리관의 붕괴를 겪은 뒤 마침내 그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사랑하는 사람을 책임질 수 있게 되는 순간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회에 편입되어 구원을 얻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허구(영화)이자 한 개인의 심리적 연대기일 뿐이라는 것. 이걸 80분도 안 되는 러닝타임에 해낸다. 그러면서도 브레송은 피사체와 카메라뿐만 아니라 텍스트도 완벽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텍스트는 행위를 할 때의 인물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함과 동시에 그 행위가 그 인물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이런 방식이 언어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긍정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언어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언어→(행위)→언어’가 아니라 ‘(언어)→행위→(언어)’를 말하는 감독. 언어가 행위의 전제인 동시에 결과이자 의미가 될 수 있고 이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도 놀라운데, 이를 카메라의 방법론과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포커스를 언어가 아닌 행위에 둔다는 점이 경이롭다.
2.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 1966
Tier: SSS / 7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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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한 영화가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이면서 성경에 관한 은유이고 장르적으로는 하드보일드 느와르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이기도 하고 폭력에 관한 서사시이면서 전락의 연대기일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심지어 영화의 주인공은 당나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브레송이 여러 인터뷰에서 〈당나귀 발타자르〉가 “내가 만든 가장 자유로운 영화, 나를 가장 많이 집어넣은 영화”라고 밝힌 것처럼 그야말로 브레송의 에센스. 영화를 보는 러닝타임에 한해서 그의 영화들 중 가장 당혹스러운 작품이었는데 이 영화의 다채로운 장르적 외피와 수많은 서브 플롯들을 일반적인 하나의 골자 안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그 모든 부분들의 합 그 이상인데도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영화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느껴졌다. 인간의 이득에 따라 계속해서 팔아넘겨지는 당나귀 발타자르의 비극적인 여정과 그 여정 속에서 잠시나마 함께하게 되는, 그러면서 끊임없이 당나귀를 학대하고 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인간의 원죄에 관한 종교적인 접근이 아니라, 자본과 교환 가치로 점철된 인간관계라는 지옥에 관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오히려 보통 이 영화와 함께 2부작으로 묶는 〈무셰트〉보다(아마 두 영화가 연달아 나와서 그런 것 같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돈〉과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이 영화는 90분 안에 담긴 세계”라는 고다르의 극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종교적 알레고리를 뛰어넘은 이 영화가 밟고 있는 관념적 영토는 너무나 거대하다.
3. 〈사형수 탈옥하다〉, 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 ou Le vent souffle où il veut, 1956
Tier: SSS / 4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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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의 가장 희망적인 걸작. 〈소매치기〉가 행위와 의미의 관계를 다룬다면 이 영화는 믿음과 희망의 관계를 다룬다. 믿을 수 있어야 희망이 생기는 건지, 희망을 먼저 품어야 탈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건지. 이 모호한 변증법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결국 의지를 가진 인간의 끊임없는 행위다. 〈소매치기〉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움직임과 행동에 대한 예찬인 것이다.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며 심지어 제목이 이야기 상의 모든 것을 스포한다. 정말 그야말로 ‘사형수가 자신이 갇힌 감옥을 탈옥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다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연출을 따라가다 보면 사형수가 갇힌 감옥의 작은 방 한 칸이 우리 마음의 방과 겹쳐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스스로가 지은 마음 속 관념의 감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옥을 시도하는 우리들. 결국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4. 〈돈〉, L'Argent, 1983
Tier: SSS / 13th Film (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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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극의 전제조건.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극적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작품이다. 학생의 철없는 기만에서 시작된 위조지폐가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박살 내고 사회 전체를 불신으로 물들이는 과정을 통해서 가치 체계의 순환과 교환이 어떻게 한 명의 주체적 존재, 더 나아가 그 존재가 속한 집단과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지에 대한 영화다. 이게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섬뜩하다. 브레송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와 소리들을 결합하여,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령을 뿜어내게 만드는 것이 시네마토그래프의 규칙이라고 언제나 말해왔다. ‘A와 B가 만나 새로운 실재를 만든다’는 시네마토그래프의 관계론이, 현실과 결합했을 때 어떻게 가장 끔찍한 파멸의 연쇄로 이어지는지를 마침내 인식한 것이다. 자신의 방법론이 가진 필연적 비극성을 인식했던 게 그가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은 이유이지 않을지 짐작해 본다.
5.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ilmente, 1977
Tier: S / 12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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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순위 매기기의 지옥이 펼쳐진다. S티어의 작품들은 내일이면 또 다른 순위일 것 같다. 그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돈〉과 함께 브레송의 가장 비관적인 작품. 68혁명의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비관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의 냉소가 진동한다. 68혁명의 핵심은 거리로 뛰어나가는 ‘정치적 행동’에 있었으나 〈아마도 악마가〉의 세계에서 청춘들의 행동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환경 파괴의 참상이 담긴 다큐멘터리 필름을 무표정하게 관람하고, 허위로 가득 찬 교회와 대학 강의실을 배회하지만 그 어떤 대안도 도출하지 못한다. 행동이 불가능해진 자리에 고이는 것은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무기력과 허무주의뿐이다. 사실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건 내재된 허무주의도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사회적인 요소들도 한몫한다. 영화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아주 우회적으로 그들의 허무와 무기력이 사회로부터 학습된 것이며 ‘아마도 악마가’ 그런 일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코멘트하며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6. 〈온순한 여인〉, Une femme douce, 1969
Tier: S / 9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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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저평가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볼 기회가 적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브레송이 만든 첫 번째 컬러 영화인데 1969년에 개봉한 그의 9번째 작품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심지어 이 작품을 포함해서 그 이후에 나오게 될 작품들은 전부 컬러 영화인데 색에 대한 이해도가 엄청나게 높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가 조금 더 일찍 컬러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지 궁금하다. 남편이라는 지배 권력이 부여하는 가치 체계에 대응하여 도미니크 상다가 연기한 여인이 선택한 침묵과 자살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시스템을 거부하는 완고한 실존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자살 장면이 이 영화에 있었다. 클라이맥스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장면의 연출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7.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1951
Tier: S / 3rd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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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두 작품도 꽤 좋지만, 여기서부터 브레송이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정말 영화가 제시하는 텍스트에 푹 빠져서 1시간 반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여러 도구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점이 가장 경이로웠다. 무엇을 내레이션으로 전달해야 할지, 무엇을 오직 이미지로만 전달해야 할지, 또 사운드는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절대 전달하면 안 되는 정보는 무엇인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앞서 〈소매치기〉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했던 ‘인간 존재의 영적인 열등성’이 이미 여기에 새겨져 있다. 이 테마를 다루는 또 다른 걸작인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의 시나리오 작가가 폴 슈레이더이며 그가 브레송의 열렬한 추종자이면서 나중에 본인이 직접 브레송의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를 오마주한 〈퍼스트 리폼드〉를 연출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8. 〈호수의 란슬롯〉, Lancelot du Lac, 1974
Tier: S / 11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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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롭게 살다가 명예롭게 죽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운가? 브레송의 초기작들은 의미와 행위의 관계를 다룬다고 느꼈는데 필모그래피를 훅 건너뛰어 〈호수의 란슬롯〉을 보니 여기서는 운명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명백하게 소리의 영화다. 거추장스러운 기사 갑옷이 부딪히면서 내는 소음의 물성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J컷(다음 장면의 오디오가 현재 장면의 화면보다 먼저 시작되는 편집 기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며 어쩌면 J컷 자체가 영화의 플롯이자 주제의식일 수도 있겠다. 소리의 흔적이 이미지보다 먼저 도달한다는 건 어쩌면 기사도의 비망록을 담아내는 최적의 형식일 것이다. 소리가 먼저 도달하고 이미지가 뒤늦게 박제되는 이 비망록을 통해, 브레송은 명예라는 무거운 유산을 짊어진 인간 실존의 아릿한 붕괴를 완벽하게 담아낸다.
9. 〈무셰트〉, Mouchette, 1967
Tier: S / 8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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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낮다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당나귀 발타자르〉 때문에 그렇다. 바로 직전 작품인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보여준 성취가 너무 커서 오히려 약간 하위 호환으로 느껴진다. 〈당나귀 발타자르〉가 가진 도스토옙스키적 규모에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단편 소설이라는 보다 좁고 폐쇄적인 영토로 세계관의 반경을 축소시킨 탓인지 그만큼의 시네마적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더 아래 티어로 내릴 수는 없었다. 그 자체로 너무 고결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특히 엔딩. 하얀 드레스를 감고 언덕을 구르는 무셰트. 시스템에 대한 거부를 자살로써 감행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오지 않을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 쇼트. 결국 아무도 오지 않고, 신의 구원조차 침묵할 때, 그녀가 선택한 세 번의 구름과 강물 속으로의 소멸. 할 말을 잃게 만든다.
10. 〈몽상가의 나흘밤〉, Quatre nuits d'un rêveur, 1971
Tier: A / 10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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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을 빼고 만든 작품일 테지만 그렇다고 영화에 힘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크게 나를 움직인 부분은 어떤 관념적인 영역이나 압도적인 연출력이 아니라 이 영화가 머금고 있는 화면의 결이다. 참 표현하기도 힘든데, 밤 풍경이 이렇게나 아릿하게 다가온다. 시스템 아래에서 타인과 온전히 연대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몽상 속에 유폐되어 있던 고독한 주체가 마주하는 실존적 위기가 그 밤 풍경에 겹쳐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브레송의 카메라는 절대 밤의 파리를 탐미적으로 잡아내지 않는다. 그저 다리 위를 지나가는 유람선의 불빛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악사들의 마른 음악 소리, 그리고 마주치지 않는 인물들의 시선 블로킹을 있는 그대로 지속시킬 뿐. 오히려 그런 담백함이 진실을 더 명징하게 드러내고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브레송은 너무 잘 알고 있다.
11. 〈죄악의 천사들〉, Les anges du péché, 1943
Tier: A / 1st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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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반열에 오르기 이전인 젊은 브레송의 쇼트 수련장. 근데 그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개봉 직후 「나는 어디에나 있다」라는 프랑스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프랑스 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브레송은 “신탁을 내릴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며 대답을 회피했지만, 어쩌면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프랑스 영화의 미래를 두 어깨에 짊어졌음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만들게 될 12편의 장편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데뷔작에 새겨져 있다. 특유의 칼 같은 쇼트가 이미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브레송이 일찍이 보여준 블로킹의 체급은 경이롭다. 인물들이 있어야 할 위치에 정확히 존재하며 이것보다 더 적확하게 찍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필모그래피 티어에서 비교적 낮은 위치에 놓은 이유는 그의 다른 걸작들에 비해 테크닉에 의존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와 블로킹의 형식이 아직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8년 뒤에 그가 만들게 될 또 다른 종교 영화인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에서는 모든 미숙함이 사라지고 데뷔작에서 보여준 그의 장점만이 아름답게 부각된다.
12. 〈잔 다르크의 재판〉, Procès de Jeanne d'Arc, 1962
Tier: B / 6th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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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은 1957년 10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인터뷰를 가졌다. ‘로베르 브레송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실리게 된 이 인터뷰에서 브레송은 2년 전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을 보았으며 이 영화가 본인에게 아주 불편하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그는 드레이어가 미학적으로 작은 혁명을 이룩했다는 걸 이해한다면서도 배우가 하나같이 광대 같고 얼
13. 〈볼로뉴 숲의 여인들〉, Les Dames du bois de Boulogne, 1945
Tier: B / 2nd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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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의 인터뷰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유독 이 영화에 대해서 말을 사린다는 점이다. 2025년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책 『브레송이 말하는 브레송(1943-1983 인터뷰집)』에서도 이 영화를 다룬 챕터의 분량은 아주 적으며 심지어 이 영화의 내적인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때까지 브레송이 보여준 필름메이킹에 대한 메타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여러 가지 상황과 인터뷰들을 조합해 봤을 때 브레송 자신도 이 작품을 실패작이라 여기는 것 같다. 나도 이 작품이 가장 아쉬웠다.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와 대사 작가로 참여한 장 콕토의 연극적인 대사가 제대로 조응하지 못하며 서로 엇갈리는 탓에 ‘이게 브레송 작품이 맞나?’라는 생각까지 들었고, 오히려 콕토의 필모그래피에 들어가야 더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다. 콕토와 브레송 모두 비평가들에게 영화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지만 그 둘이 추구하는 시의 형식은 너무나 달랐다. 콕토는 문학적 영감과 환상주의가 프레임을 채워야 한다고 믿었던 반면 브레송은 연극성을 최대한 거세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둘은 서로를 존경했지만 그 존경심이 협업의 시너지로 이어지기엔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1. 〈소매치기〉, Pickpocket, 1959
Tier: SSS / 5th Film

인간 삶의 영적인 열등성에 관한 시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브레송의 최고작이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었던 사람이 다시 사회로 편입되는 과정에 대한 심리적인 연대기인 이 영화는 시작부터 비범하다. 제목이 소매치기인데 범죄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나올 내용이 허구이며 더 나아가 이 모든 내용이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심리적으로 전개되는 상상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한다. 이 오프닝이 매혹적인 이유는 개인의 심리적 삶에는 어떤 영적인 열등성이 존재한다는 걸 일깨워줘서이지 않을까? 우리의 영혼은 영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열등하기도 하다는 점. 우린 언제나 범죄로 이어지는 위험한 망상을 하기 십상이며 나쁜 짓을 하면서도 당당히 구원을 구걸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나는 특별하다는 자각 때문에 모든 도덕과 법 체계를 적어도 자신의 내면 세계 안에서는 완전히 무너뜨리고 이상한 망상을 이어간다는 점. 어쩌면 브레송의 〈소매치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영화일 수도 있겠다. 삶의 영적인 열등성을 인식한 사회 바깥의 존재가 소매치기라는 범죄 행위에 집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윤리관의 붕괴를 겪은 뒤 마침내 그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사랑하는 사람을 책임질 수 있게 되는 순간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회에 편입되어 구원을 얻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허구(영화)이자 한 개인의 심리적 연대기일 뿐이라는 것. 이걸 80분도 안 되는 러닝타임에 해낸다. 그러면서도 브레송은 피사체와 카메라뿐만 아니라 텍스트도 완벽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텍스트는 행위를 할 때의 인물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함과 동시에 그 행위가 그 인물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이런 방식이 언어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긍정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언어로 가득 찬 세상에서 ‘언어→(행위)→언어’가 아니라 ‘(언어)→행위→(언어)’를 말하는 감독. 언어가 행위의 전제인 동시에 결과이자 의미가 될 수 있고 이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도 놀라운데, 이를 카메라의 방법론과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포커스를 언어가 아닌 행위에 둔다는 점이 경이롭다.
2. 〈당나귀 발타자르〉, Au hasard Balthazar, 1966
Tier: SSS / 7th Film

어떻게 한 영화가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이면서 성경에 관한 은유이고 장르적으로는 하드보일드 느와르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이기도 하고 폭력에 관한 서사시이면서 전락의 연대기일 수가 있을까. 그러면서 심지어 영화의 주인공은 당나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브레송이 여러 인터뷰에서 〈당나귀 발타자르〉가 “내가 만든 가장 자유로운 영화, 나를 가장 많이 집어넣은 영화”라고 밝힌 것처럼 그야말로 브레송의 에센스. 영화를 보는 러닝타임에 한해서 그의 영화들 중 가장 당혹스러운 작품이었는데 이 영화의 다채로운 장르적 외피와 수많은 서브 플롯들을 일반적인 하나의 골자 안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그 모든 부분들의 합 그 이상인데도 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영화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느껴졌다. 인간의 이득에 따라 계속해서 팔아넘겨지는 당나귀 발타자르의 비극적인 여정과 그 여정 속에서 잠시나마 함께하게 되는, 그러면서 끊임없이 당나귀를 학대하고 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인간의 원죄에 관한 종교적인 접근이 아니라, 자본과 교환 가치로 점철된 인간관계라는 지옥에 관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오히려 보통 이 영화와 함께 2부작으로 묶는 〈무셰트〉보다(아마 두 영화가 연달아 나와서 그런 것 같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돈〉과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이 영화는 90분 안에 담긴 세계”라는 고다르의 극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종교적 알레고리를 뛰어넘은 이 영화가 밟고 있는 관념적 영토는 너무나 거대하다.
3. 〈사형수 탈옥하다〉, Un condamné à mort s'est échappé ou Le vent souffle où il veut, 1956
Tier: SSS / 4th Film

브레송의 가장 희망적인 걸작. 〈소매치기〉가 행위와 의미의 관계를 다룬다면 이 영화는 믿음과 희망의 관계를 다룬다. 믿을 수 있어야 희망이 생기는 건지, 희망을 먼저 품어야 탈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건지. 이 모호한 변증법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결국 의지를 가진 인간의 끊임없는 행위다. 〈소매치기〉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움직임과 행동에 대한 예찬인 것이다.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며 심지어 제목이 이야기 상의 모든 것을 스포한다. 정말 그야말로 ‘사형수가 자신이 갇힌 감옥을 탈옥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다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연출을 따라가다 보면 사형수가 갇힌 감옥의 작은 방 한 칸이 우리 마음의 방과 겹쳐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스스로가 지은 마음 속 관념의 감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옥을 시도하는 우리들. 결국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4. 〈돈〉, L'Argent, 1983
Tier: SSS / 13th Film (Last)

모든 비극의 전제조건.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극적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작품이다. 학생의 철없는 기만에서 시작된 위조지폐가 사람들 사이를 순환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박살 내고 사회 전체를 불신으로 물들이는 과정을 통해서 가치 체계의 순환과 교환이 어떻게 한 명의 주체적 존재, 더 나아가 그 존재가 속한 집단과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지에 대한 영화다. 이게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섬뜩하다. 브레송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와 소리들을 결합하여,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령을 뿜어내게 만드는 것이 시네마토그래프의 규칙이라고 언제나 말해왔다. ‘A와 B가 만나 새로운 실재를 만든다’는 시네마토그래프의 관계론이, 현실과 결합했을 때 어떻게 가장 끔찍한 파멸의 연쇄로 이어지는지를 마침내 인식한 것이다. 자신의 방법론이 가진 필연적 비극성을 인식했던 게 그가 19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은 이유이지 않을지 짐작해 본다.
5. 〈아마도 악마가〉, Le diable probabilmente, 1977
Tier: S / 12th Film

여기서부터 순위 매기기의 지옥이 펼쳐진다. S티어의 작품들은 내일이면 또 다른 순위일 것 같다. 그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돈〉과 함께 브레송의 가장 비관적인 작품. 68혁명의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비관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의 냉소가 진동한다. 68혁명의 핵심은 거리로 뛰어나가는 ‘정치적 행동’에 있었으나 〈아마도 악마가〉의 세계에서 청춘들의 행동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환경 파괴의 참상이 담긴 다큐멘터리 필름을 무표정하게 관람하고, 허위로 가득 찬 교회와 대학 강의실을 배회하지만 그 어떤 대안도 도출하지 못한다. 행동이 불가능해진 자리에 고이는 것은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무기력과 허무주의뿐이다. 사실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건 내재된 허무주의도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사회적인 요소들도 한몫한다. 영화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아주 우회적으로 그들의 허무와 무기력이 사회로부터 학습된 것이며 ‘아마도 악마가’ 그런 일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코멘트하며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6. 〈온순한 여인〉, Une femme douce, 1969
Tier: S / 9th Film

개인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저평가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볼 기회가 적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브레송이 만든 첫 번째 컬러 영화인데 1969년에 개봉한 그의 9번째 작품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심지어 이 작품을 포함해서 그 이후에 나오게 될 작품들은 전부 컬러 영화인데 색에 대한 이해도가 엄청나게 높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가 조금 더 일찍 컬러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지 궁금하다. 남편이라는 지배 권력이 부여하는 가치 체계에 대응하여 도미니크 상다가 연기한 여인이 선택한 침묵과 자살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시스템을 거부하는 완고한 실존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자살 장면이 이 영화에 있었다. 클라이맥스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장면의 연출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7.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1951
Tier: S / 3rd Film

첫 두 작품도 꽤 좋지만, 여기서부터 브레송이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정말 영화가 제시하는 텍스트에 푹 빠져서 1시간 반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여러 도구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점이 가장 경이로웠다. 무엇을 내레이션으로 전달해야 할지, 무엇을 오직 이미지로만 전달해야 할지, 또 사운드는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절대 전달하면 안 되는 정보는 무엇인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앞서 〈소매치기〉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했던 ‘인간 존재의 영적인 열등성’이 이미 여기에 새겨져 있다. 이 테마를 다루는 또 다른 걸작인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의 시나리오 작가가 폴 슈레이더이며 그가 브레송의 열렬한 추종자이면서 나중에 본인이 직접 브레송의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를 오마주한 〈퍼스트 리폼드〉를 연출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8. 〈호수의 란슬롯〉, Lancelot du Lac, 1974
Tier: S / 11th Film

명예롭게 살다가 명예롭게 죽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운가? 브레송의 초기작들은 의미와 행위의 관계를 다룬다고 느꼈는데 필모그래피를 훅 건너뛰어 〈호수의 란슬롯〉을 보니 여기서는 운명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명백하게 소리의 영화다. 거추장스러운 기사 갑옷이 부딪히면서 내는 소음의 물성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J컷(다음 장면의 오디오가 현재 장면의 화면보다 먼저 시작되는 편집 기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며 어쩌면 J컷 자체가 영화의 플롯이자 주제의식일 수도 있겠다. 소리의 흔적이 이미지보다 먼저 도달한다는 건 어쩌면 기사도의 비망록을 담아내는 최적의 형식일 것이다. 소리가 먼저 도달하고 이미지가 뒤늦게 박제되는 이 비망록을 통해, 브레송은 명예라는 무거운 유산을 짊어진 인간 실존의 아릿한 붕괴를 완벽하게 담아낸다.
9. 〈무셰트〉, Mouchette, 1967
Tier: S / 8th Film

생각보다 낮다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당나귀 발타자르〉 때문에 그렇다. 바로 직전 작품인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보여준 성취가 너무 커서 오히려 약간 하위 호환으로 느껴진다. 〈당나귀 발타자르〉가 가진 도스토옙스키적 규모에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단편 소설이라는 보다 좁고 폐쇄적인 영토로 세계관의 반경을 축소시킨 탓인지 그만큼의 시네마적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더 아래 티어로 내릴 수는 없었다. 그 자체로 너무 고결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특히 엔딩. 하얀 드레스를 감고 언덕을 구르는 무셰트. 시스템에 대한 거부를 자살로써 감행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오지 않을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 쇼트. 결국 아무도 오지 않고, 신의 구원조차 침묵할 때, 그녀가 선택한 세 번의 구름과 강물 속으로의 소멸. 할 말을 잃게 만든다.
10. 〈몽상가의 나흘밤〉, Quatre nuits d'un rêveur, 1971
Tier: A / 10th Film

가장 힘을 빼고 만든 작품일 테지만 그렇다고 영화에 힘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크게 나를 움직인 부분은 어떤 관념적인 영역이나 압도적인 연출력이 아니라 이 영화가 머금고 있는 화면의 결이다. 참 표현하기도 힘든데, 밤 풍경이 이렇게나 아릿하게 다가온다. 시스템 아래에서 타인과 온전히 연대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몽상 속에 유폐되어 있던 고독한 주체가 마주하는 실존적 위기가 그 밤 풍경에 겹쳐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브레송의 카메라는 절대 밤의 파리를 탐미적으로 잡아내지 않는다. 그저 다리 위를 지나가는 유람선의 불빛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악사들의 마른 음악 소리, 그리고 마주치지 않는 인물들의 시선 블로킹을 있는 그대로 지속시킬 뿐. 오히려 그런 담백함이 진실을 더 명징하게 드러내고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브레송은 너무 잘 알고 있다.
11. 〈죄악의 천사들〉, Les anges du péché, 1943
Tier: A / 1st Film

아직 반열에 오르기 이전인 젊은 브레송의 쇼트 수련장. 근데 그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개봉 직후 「나는 어디에나 있다」라는 프랑스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프랑스 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브레송은 “신탁을 내릴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며 대답을 회피했지만, 어쩌면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프랑스 영화의 미래를 두 어깨에 짊어졌음을 직감하지 않았을까.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만들게 될 12편의 장편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데뷔작에 새겨져 있다. 특유의 칼 같은 쇼트가 이미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브레송이 일찍이 보여준 블로킹의 체급은 경이롭다. 인물들이 있어야 할 위치에 정확히 존재하며 이것보다 더 적확하게 찍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필모그래피 티어에서 비교적 낮은 위치에 놓은 이유는 그의 다른 걸작들에 비해 테크닉에 의존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와 블로킹의 형식이 아직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8년 뒤에 그가 만들게 될 또 다른 종교 영화인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에서는 모든 미숙함이 사라지고 데뷔작에서 보여준 그의 장점만이 아름답게 부각된다.
12. 〈잔 다르크의 재판〉, Procès de Jeanne d'Arc, 1962
Tier: B / 6th Film

브레송은 1957년 10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인터뷰를 가졌다. ‘로베르 브레송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실리게 된 이 인터뷰에서 브레송은 2년 전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을 보았으며 이 영화가 본인에게 아주 불편하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그는 드레이어가 미학적으로 작은 혁명을 이룩했다는 걸 이해한다면서도 배우가 하나같이 광대 같고 얼
13. 〈볼로뉴 숲의 여인들〉, Les Dames du bois de Boulogne, 1945
Tier: B / 2nd Film

브레송의 인터뷰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유독 이 영화에 대해서 말을 사린다는 점이다. 2025년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책 『브레송이 말하는 브레송(1943-1983 인터뷰집)』에서도 이 영화를 다룬 챕터의 분량은 아주 적으며 심지어 이 영화의 내적인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때까지 브레송이 보여준 필름메이킹에 대한 메타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여러 가지 상황과 인터뷰들을 조합해 봤을 때 브레송 자신도 이 작품을 실패작이라 여기는 것 같다. 나도 이 작품이 가장 아쉬웠다.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와 대사 작가로 참여한 장 콕토의 연극적인 대사가 제대로 조응하지 못하며 서로 엇갈리는 탓에 ‘이게 브레송 작품이 맞나?’라는 생각까지 들었고, 오히려 콕토의 필모그래피에 들어가야 더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개인적인 결론을 내렸다. 콕토와 브레송 모두 비평가들에게 영화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지만 그 둘이 추구하는 시의 형식은 너무나 달랐다. 콕토는 문학적 영감과 환상주의가 프레임을 채워야 한다고 믿었던 반면 브레송은 연극성을 최대한 거세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둘은 서로를 존경했지만 그 존경심이 협업의 시너지로 이어지기엔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