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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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송혜령
WEDITOR 송혜령
공간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당연히 이는 지난 27일 개봉한 영화 〈백룸(2026)〉에 대한 이야기다. 블렌더를 이용한 각종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던 20살의 케인 파슨스가 제작한 이 영화는 개봉 주에 A24 역대 흥행작 〈마티 슈프림(2025)〉의 오프닝 스코어를 꺾고 뭇사람들의 공포와 향수를 자극하며 그 흥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흥행은 둘째치고, 이 영화에 대해 많은 갑론을박이 오가는 와중에도 '백룸' 자체를 보여주어 그저 고맙다는 평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서사 전개를 위해 기대해 온 소재 '백룸'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데 감사해하는 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한 스토리 전개로 정작 백룸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도 그저 그런 영화들의 축에 나란히 섰겠지만, 영화는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백룸을 그저 보여주는 것에 할애한다. 또 혹자는 〈백룸〉에 등장하는 엔티티가 그간 유튜브나 각종 게임에서 자주 모습을 비춰 온 '박테리아'가 아니라는 데 안도하기도 했다. 박테리아는 게임 내에서는 위협적이나 디자인 자체는 꽤나 심플한 편이라, 극장 벽면을 꽉 채운 화면에서 그 존재감은 분명 의아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밑밥을 까는 이유는, 전 세계 최초 개봉으로 관람한 영화 〈백룸〉 속 엔티티가 무척 의외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노란색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지의 공간, 백룸. 그 규모만큼이나 한 번에 확보하기 어려운 시야와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묘한 공포심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어떤 존재감을 감각하게 만든다. '나 혼자일 리 없어'와 '내가 정말 혼자네'가 공존하는 이 광활한 공간이 양가적인 감정을 소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공간을 영화라는 매체로 구현하려면 당연히 무언가가 필요하다. 긴장을 조형할 존재, 즉 공포의 진원지 말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노란 방호복을 입은 연구원이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피해 본부로 돌아가려 발버둥치는 파운드 푸티지를 제시한다. 이미 알 수 없는 이 공간 안에 무언가가 있다. 관객은 그 존재에 대한 의문을 내내 놓지 못한다. 클락이 발을 들일 때도, 이후 메리가 들어설 때도 예외 없이. 영화는 이처럼 처음부터 못을 박는다. 이곳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고.

그렇게 러닝타임이 흐르고 클락의 자기 연민을 포함한 일장 연설을 마주한 우리는 한 가지 혼란에 빠진다. 클락의 시점에서 진행되었기에 그의 시점으로 움직이던 관객이, 이윽고 메리의 시점에서 클락을 적으로 마주하고, 그가 스스로를 받아들여 메리를 풀어준 이후에도 클락의 모습을 한 엔티티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클락이 백룸에 입장하기 전부터 존재했을 저 엔티티, 이하 해적에 대해 영화는 이 공간이 세상을 기억하는 일종의 저장소임을 밝히는 동시에, 단순히 공간의 옮겨짐뿐 아니라 사람 역시 기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 괴담에서 시작한 백룸의 정체를 그간 많은 사람이 궁금해 왔고, 감독 케인 파슨스는 영화를 통해 이곳이 바로 시간이 저장되는, 기어이 나까지 기억되는 전대미문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나름의 정의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 저장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낯선 얼굴을 마주한다. 다름 아닌 또 다른 나다.
또 다른 내가 나와 공존하고, 그런 또 다른 내가 나를 공격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곳. 나는 이런 공간을 하나 더 알고 있다. 바로 조던 필의 〈어스(2019)〉 속 복제인들의 지하실이다. 영화 〈어스〉는 모종의 이유로 지하실에서 우리와 똑같은 복제인들이, 같지만 한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묘사한다. 우리가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며 웃을 때 그들은 차가운 단칸방에서 우리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따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자의가 심어지는 순간, 위와 아래는 뒤바뀌게 된다. 내 행동을 기계적으로 따라 하던 존재는 이제 완벽한 짝을 이룬 가위라는 수단으로 나를 살해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끝내 감추어둔 한 가지가 있다. 지상에서 웃으며 살아온 '나'가 실은 오래전 지하실에서 태어난 복제체였고, 가위를 든 채 올라온 '너'야말로 원래 세상에서 살아온 진정한 '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살해는 낯선 침입자의 것이 아니라, 빼앗긴 자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일에 가깝다. 클락을 살해한 해적, 나를 살해하려는 너. 각 영화는 나와 또 다른 나, 이 둘을 완벽하게 구분하면서 동시에 같은 선상에 놓는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공간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백룸도 지하실도 시작은 그저 텅 빈 곳이었다. 의미 없이 이어지고, 의미 없이 반복되던 곳. 그러나 그 안에서 해적이 클락을 삼키고 네가 나의 자리를 노리는 순간, 이 빈 곳들은 더 이상 단순한 배경이기를 그만둔다. 비로소 무언가가 그곳에 새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형용할 수 없던 곳이 특정 의미를 갖게 된다는 건, 공간에서 장소로 변모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 정의를 한 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간Space은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빈 곳.
장소Place는 그 공간에 인간의 경험, 감정, 가치가 더해져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
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빈 곳은 어쩐지 곧바로 백룸과 지하실을 떠올리게 한다. 비어있고 그저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곳. 하지만 이러한 공간에서 해적이 클락을 살해하고, 네가 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나를 죽이려 할 때, 이곳은 더 이상 공간이 아닌 장소가 된다.
흥미로운 건 그 의미를 새기는 손길이 다름 아닌 또 다른 나라는 점이다. 장소는 보통 타인과의 관계로, 추억과 애착으로 빚어진다. 그런데 이 두 공간을 장소로 바꿔놓는 건 나를 지우려는 또 다른 나라니. 애착이 아니라 살의로 새겨진 장소인 셈이다. 가장 나다운 곳, 나를 가장 잘 아는 존재가 있는 곳이 어째서 나를 죽이는 장소가 된 걸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건 결국 또 다른 나뿐이기 때문은 아닐까.
다만 두 영화의 또 다른 나는 같은 듯 다르다. 백룸의 해적은 클락이 외면해 온 자기 자신이다. 알코올 중독과 이혼,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던 자기 연민과 공격성이 따로 떨어져 나와 거대하게 굳어버린 형상, 그것이 바로 해적이다. 그래서 클락은 메리를 풀어주며 잠시 제정신을 되찾은 바로 그 순간, 끝내 화해하지 못했던 지난 자신에게 삼켜진다. 메리에게서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클락은 자신을 고치려 들지 않은 채 백룸에 머물기로 하고, 해적을 향해서도 이대로 괜찮지 않으냐고 달랜다. 그러나 해적은 그 체념을 달래는 손길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한 듯 그를 물어뜯는다. 감독 케인 파슨스는 이 공간을 클락의 반향실이라 불렀다. 내면이 벽으로 토해져 나와 그대로 되울리는 곳. 그러니 클락이 끝내 되울린 것이 변하지 않겠다는 체념이었다면, 그 반향인 해적이 그를 집어삼킨 것도 무리는 아니다. 끌어안으려는 순간 그가 끌어안은 건 결국 교정되지 않은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반면 〈어스〉의 너는, 앞서 보았듯 내가 외면한 나가 아니라 애초에 나였던 너다. 지상에서 웃으며 살아온 나는 빼앗은 자리에 앉아 있던 가짜였고, 차가운 지하에서 내 행동을 따라 하며 때를 기다려온 너야말로 원래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백룸의 살해가 나를 내 안으로 함몰시킨다면, 〈어스〉의 살해는 방향이 정반대다. 그것은 안으로 무너지는 일이 아니라 빼앗긴 자리를 바깥에서 되찾아오는, 위치의 전복이다. 그리고 이 전복은 한 사람의 복수에서 멈추지 않는다. 평생 지상의 동작을 기계적으로 따라 하던 지하의 모두에게 바깥으로 나갈 의지를 심고, 끝내 손을 맞잡은 그들이 지상을 차지하게 만드는 반란이자 교체로 번진다. 한 번도 제 삶을 가져본 적 없던 이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지하실이라는 공간에서 시작된 균열이 마침내 지상이라는 공간 전체를 그들의 장소로 다시 쓰는 것이다.

이처럼 백룸의 또 다른 나는 나를 안으로 집어삼키고, 〈어스〉의 또 다른 나는 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선다. 한쪽은 안으로 닫히고, 한쪽은 밖으로 번진다. 그러나 방향이 어느 쪽이 됐든, 텅 빈 공간에서 일어선 또 다른 나는 결국 같은 장소에서 태어난 셈이다. 내가 외면했거나 빼앗았던 삶, 끝내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그 삶이 따로 떨어져 나와 내 자리를 노리는 것이니 말이다.
마침 두 영화는 그 존재에 각각 이름을 붙여두었다. 〈백룸〉은 그 저장소가 빚어낸 그것을 '정물Still Life'이라 부르고, 〈어스〉는 지하에서 태어난 그들을 '테더드Tethered', 묶인 자들이라 부른다. 멈춘 채 기억된 것과, 묶인 채 따라 하던 것. 이 두 이름이야말로 공간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물은 끝내 제자리에서 나를 삼키며 일부분만이 기억되고, 묶인 자는 그 끈을 끊고 밖으로 걸어 나와 나를 교체한다. 공간에서 살던 것들이 장소 그 자체가 되려는 순간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당부하건대, 부디 등 뒤를 조심하시길. 어느 텅 빈 복도에서, 혹은 발밑의 어느 지하실에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또 다른 내가 내 자리를 노리고 있을지 모르니. 잡아먹히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