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세우스는 남자가 좋대
WEBZINE
WEDITOR 엄동욱
WEDITOR 엄동욱
오디세우스가 집에 가는 데에는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호메로스의 원전에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신들의 분노와 저주를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신화란 본디 인간들의, 인간들을 위한 이야기이므로 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독해해보자. 예컨대 체사레 파베세는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와 함께 있을 때 불멸과 영원을 쫓을 수 있었지만 끝내 인간의 운명을 선택했다고 풀이했고, 제임스 조이스는 아내가 집에 다른 남자를 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남자가 배회하다 집에 돌아오는 이야기로 변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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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전통적인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오디세이아를 ‘부당한 방법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한 군인이 귀환 도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이야기’로 새롭게 해석한다. 놀란은 오디세우스가 왜 늦었냐는 질문에 그가 신의 법을 어겼기에 집에 가기를 주저했다고 주장하면서, 원전에서 서술한 신들의 질서와 금기에 대한 위반을 전쟁 윤리와 죄책감의 언어로 번역했다. 이러한 해석이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데, 오디세우스의 내면을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채워버리는 순간 이 길고 긴 여정이 너무 뻔한 가족 치유 서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후회하는 백인 권력자 남성이 고난 끝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내면의 상처를 봉합하는 고루한 할리우드식 해석이지 않은가.
조금 더 재밌는 가설을 세워보자. 오디세우스가 늦었던 이유는 그가 불시착한 섬에서 만난 아리따운 원주민 여인과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칼립소와 키르케의 등장을 각색해 식민지 로맨스물로 연출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오디세우스가 오랜 시간 함께 표류하며 열심히 노 젓던 부하 선원들의 불끈 솟은 이두박근에 야릇한 욕망을 느꼈던 건 아니었을까? 동성애 문화가 만연하던 고대 그리스의 정예 군대 문화,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우들 간의 전우애, 그리고 땀내 나는 이들을 오랜 시간 묶어둔 좁은 갑판 위의 환경을 고려해보면 아예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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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벨기에의 영화감독 에릭 드 퀴페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오디세이아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그는 〈핑크 율리시스(1990)〉를 연출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원전의 서사를 따라가는데, 화면에는 근육 빵빵한 남자들이 등장하면서 호모 에로틱한 관능을 마구 뿜어낸다. 여기에 더해 퀴페는 바다 위에서 자고, 노 젓고, 노동하는 남성들의 푸티지들과(〈전함 포템킨(1925)〉에서 자고 있는 선원들의 장면도 포함되었다) 혼자 자위하고 춤추는 남성의 이미지들을 사이사이에 배치하며 남성들의 신체를 이야기의 전경에 위치시킨다.
남성들의 신체가 전경에 놓이자 숨어 있던 오디세이아의 동력이 솟아오른다.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육지 위에서 낮에는 거짓된 영웅담을 짓고 밤에는 불안과 망상으로 풀어헤치는 페넬로페의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바다에서 노를 젓고 항해하며 이야기를 직접 끌어가는 남자들의 것이 된다. 오디세우스를 이타카까지 데려다준 것은 그의 죄책감이나 왕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열심히 노를 젓는 선원들의 이두박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퀴페가 묘사하는 신체는 페넬로페와 왕국의 부름에 따라 특정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떠맡긴 신체가 아니다. 그것은 직접 움직이면서 관능을 뽐내는 신체들, 노동하며 기능하고 또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신체들(자위라는 행위의 본질을 떠올려보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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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퀴페가 표현하는 신체적 관능은 오히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을 마주했을 때 가장 극대화된다. 오디세우스는 이야기 내내 의지에 상관없이 역경에 떠밀려 다니지만, 세이렌을 마주할 때만큼은 온전한 자기 의지로 몸을 묶어 단단히 고정한다. 이 정지의 순간이 찾아오면 끊임없이 움직이던 신체가 온 시선을 받는 ‘전시’의 신체로 뒤바뀐다. 밧줄에 묶인 몸은 아버지, 왕, 권력자, 영웅의 역할 중 그 어떤 것도 떠맡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서 있는 신체로서 바다 한복판에 전시된다. 하지만 이 신체가 수동적인 관음의 대상이 아님은 비교적 명확하다. 오디세우스는 마치 BDSM 플레이를 즐기는 마조히스트처럼, 자기가 원해서 먼저 몸을 묶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만 그 대가로 스스로에게 허락한 세이렌의 노래를 한껏 누린다.
그러므로 오디세이아를 퀴어링할 때 중요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사실은 게이였던 것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사회적 지위나 역할도 부여하지 않는 ‘바다’라는 장소 위에서 한 남자의 신체가 가장 자유로워진다는 역설이다. 바다는 그 남자를 거센 파도로 몰아붙이며 어디론가 움직일 것을 계속 요구하지만, 동시에 직접 방향을 조종하게끔 작은 틈새를 열어놓는다. 〈오디세이(2026)〉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오디세우스의 말을 안 들어먹는 부하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바다는 육지의 단단한 법과 위계가 쉽게 기능하지 못하는 매우 거칠고 맹목적인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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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관능적인 모험이 끝나고 육지로 돌아오면, 오디세우스는 다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반기는 아내를 뒤로한 채 아들에게로 달려간다. 그는 가부장의 권위를 되찾고 아내와의 이성애적 결합을 반복하는 대신에 건실한 청년이 된 아들 텔레마코스의 탐스러운 대흉근 위로 쓰러지듯 안긴다. 이 순간에 이타카로의 귀환이라는 닫힌 구조의 서사가 탈선하면서 새로운 남성적 욕망의(그러나 결코 남성적이지 않은) 지도가 완성된다. 표류하던 오디세우스의 함선은 조금씩 모래바닥을 갉아먹는 파도처럼, 또 제 욕망을 숨기고 아닌 척 모가지를 빳빳이 세운 트로이 목마처럼, 천천히 육지로 떠밀려 오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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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전통적인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오디세이아를 ‘부당한 방법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한 군인이 귀환 도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이야기’로 새롭게 해석한다. 놀란은 오디세우스가 왜 늦었냐는 질문에 그가 신의 법을 어겼기에 집에 가기를 주저했다고 주장하면서, 원전에서 서술한 신들의 질서와 금기에 대한 위반을 전쟁 윤리와 죄책감의 언어로 번역했다. 이러한 해석이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데, 오디세우스의 내면을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채워버리는 순간 이 길고 긴 여정이 너무 뻔한 가족 치유 서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후회하는 백인 권력자 남성이 고난 끝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내면의 상처를 봉합하는 고루한 할리우드식 해석이지 않은가.
조금 더 재밌는 가설을 세워보자. 오디세우스가 늦었던 이유는 그가 불시착한 섬에서 만난 아리따운 원주민 여인과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칼립소와 키르케의 등장을 각색해 식민지 로맨스물로 연출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오디세우스가 오랜 시간 함께 표류하며 열심히 노 젓던 부하 선원들의 불끈 솟은 이두박근에 야릇한 욕망을 느꼈던 건 아니었을까? 동성애 문화가 만연하던 고대 그리스의 정예 군대 문화,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우들 간의 전우애, 그리고 땀내 나는 이들을 오랜 시간 묶어둔 좁은 갑판 위의 환경을 고려해보면 아예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벨기에의 영화감독 에릭 드 퀴페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오디세이아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그는 〈핑크 율리시스(1990)〉를 연출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원전의 서사를 따라가는데, 화면에는 근육 빵빵한 남자들이 등장하면서 호모 에로틱한 관능을 마구 뿜어낸다. 여기에 더해 퀴페는 바다 위에서 자고, 노 젓고, 노동하는 남성들의 푸티지들과(〈전함 포템킨(1925)〉에서 자고 있는 선원들의 장면도 포함되었다) 혼자 자위하고 춤추는 남성의 이미지들을 사이사이에 배치하며 남성들의 신체를 이야기의 전경에 위치시킨다.
남성들의 신체가 전경에 놓이자 숨어 있던 오디세이아의 동력이 솟아오른다.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 육지 위에서 낮에는 거짓된 영웅담을 짓고 밤에는 불안과 망상으로 풀어헤치는 페넬로페의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바다에서 노를 젓고 항해하며 이야기를 직접 끌어가는 남자들의 것이 된다. 오디세우스를 이타카까지 데려다준 것은 그의 죄책감이나 왕으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열심히 노를 젓는 선원들의 이두박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퀴페가 묘사하는 신체는 페넬로페와 왕국의 부름에 따라 특정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떠맡긴 신체가 아니다. 그것은 직접 움직이면서 관능을 뽐내는 신체들, 노동하며 기능하고 또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신체들(자위라는 행위의 본질을 떠올려보라)이다.

한편으로 퀴페가 표현하는 신체적 관능은 오히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을 마주했을 때 가장 극대화된다. 오디세우스는 이야기 내내 의지에 상관없이 역경에 떠밀려 다니지만, 세이렌을 마주할 때만큼은 온전한 자기 의지로 몸을 묶어 단단히 고정한다. 이 정지의 순간이 찾아오면 끊임없이 움직이던 신체가 온 시선을 받는 ‘전시’의 신체로 뒤바뀐다. 밧줄에 묶인 몸은 아버지, 왕, 권력자, 영웅의 역할 중 그 어떤 것도 떠맡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서 있는 신체로서 바다 한복판에 전시된다. 하지만 이 신체가 수동적인 관음의 대상이 아님은 비교적 명확하다. 오디세우스는 마치 BDSM 플레이를 즐기는 마조히스트처럼, 자기가 원해서 먼저 몸을 묶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만 그 대가로 스스로에게 허락한 세이렌의 노래를 한껏 누린다.
그러므로 오디세이아를 퀴어링할 때 중요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사실은 게이였던 것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사회적 지위나 역할도 부여하지 않는 ‘바다’라는 장소 위에서 한 남자의 신체가 가장 자유로워진다는 역설이다. 바다는 그 남자를 거센 파도로 몰아붙이며 어디론가 움직일 것을 계속 요구하지만, 동시에 직접 방향을 조종하게끔 작은 틈새를 열어놓는다. 〈오디세이(2026)〉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오디세우스의 말을 안 들어먹는 부하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바다는 육지의 단단한 법과 위계가 쉽게 기능하지 못하는 매우 거칠고 맹목적인 장소이다.

길고 긴 관능적인 모험이 끝나고 육지로 돌아오면, 오디세우스는 다시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반기는 아내를 뒤로한 채 아들에게로 달려간다. 그는 가부장의 권위를 되찾고 아내와의 이성애적 결합을 반복하는 대신에 건실한 청년이 된 아들 텔레마코스의 탐스러운 대흉근 위로 쓰러지듯 안긴다. 이 순간에 이타카로의 귀환이라는 닫힌 구조의 서사가 탈선하면서 새로운 남성적 욕망의(그러나 결코 남성적이지 않은) 지도가 완성된다. 표류하던 오디세우스의 함선은 조금씩 모래바닥을 갉아먹는 파도처럼, 또 제 욕망을 숨기고 아닌 척 모가지를 빳빳이 세운 트로이 목마처럼, 천천히 육지로 떠밀려 오고 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