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dItLikeMartens
WEBZINE
WEDITOR 이승민
필자의 취미 중 하나는 패션쇼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다. 패션을 좋아하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먼저 그 다음의 크리스티안 디올, 코코 샤넬과 같은 위대한 디자이너가 탄생하는 순간을 직접 경험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올해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필자의 시선을 유달리 사로잡은 것은 프라다, 펜디와 같은 대형 하우스 브랜드들이 아닌 2000년대 초부터 중반, Y2K 트렌드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쳐 럭셔리 패션계에서 점점 잊히던 이탈리아 데님 레이블 디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디젤의 가을 컬렉션이 발표되기 한 달 전, 글렌 마틴스의 와이프로젝트와 일회성으로 디자인한 장 폴 고티에 꾸뛰르 컬렉션을 보고나서 그의 디젤 데뷔 런웨이 패션쇼에 대한 기대감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틴스는 필자에게 항상 다음 컬렉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디자이너다. 그는 디젤 컬렉션으로 그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쇠퇴의 길을 걷던 레이블에 다시 섹시함과 쿨함을 되찾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티셔츠와 데님 재고를 해체하고 재건하여 만든 롱 스커트와 오버사이즈 데님팬츠들은 꾸뛰르에 가까운 정교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마틴스는 마치 누구도 데님에 대한 자신의 창의성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듯, 데님 디자인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디젤의 가을 컬렉션은 레이블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쇼임과 동시에 마틴 마르지엘라, 이브 생로랑과 같은 희대의 디자이너 반열에 글렌 마틴스가 오르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글렌 마틴스는 어떤 디자이너인가? 그가 와이프로젝트에서 보여준 과장된 볼륨감과 각기 다른 의상의 하이브리다이징을통해 표현된 레이어드 룩으로 대표되는 맥시멀리스트인가? 아니다, 글렌 마틴스의 디자인 보이스는 미니멀리즘이며 그는 현재 미니멀리즘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 패션이 무엇인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최소한을 뜻하는 ‘minimal’에서 알 수 있듯이 미니멀리즘은 필수적인 요소들 외 부가적인 모든 것들을 제외해 본질만을 남기는 것을 추구하는 예술사조다. 사람들이 흔히 ‘무난한’, ‘깔끔한’이라는 표현과 함께 미니멀리즘이라 일컫는 것은 미니멀리즘 패션과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슬랙스, 배바지, 블레이저로 대표되는 ‘남친룩’ 조합을 미니멀리즘과 혼동하여 사용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답습하는 안타까운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성의 없이 주장하는 ‘미니멀리즘’은 어떠한 개성도 없이 지루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패션을 멋스러운 단어 하나로 애써 포장하는 노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Quiet but Powerful’, 결국 본질에 중점을 둔 미니멀리즘이 패션으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캔버스 위에 색상, 실루엣 등을 끼얹어 자기만의 색깔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미니멀리즘의 정의로 돌아가면 의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가장 강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선(line), 즉 의복의 실루엣이다. 동일한 2장의 셔츠도 숄더라인의 길이와 부피, 그리고 허리라인의 차이로 완전히 다른 무드의 디자인이 되듯, 디자인의 외형적인 결과물에 있어서 의복의 실루엣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주어진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인위적인’ 비율 조작으로 가장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실루엣을 선보이고 있는 글렌 마틴스는 미니멀리즘 패션의 정점에 있다.
마틴스의 디자인 보이스가 미니멀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2008년 앤트워프 왕립 예술 학교 졸업 컬렉션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신인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어필하여 눈도장을 찍는 것이 중요한 졸업 컬렉션에서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은 임팩트가 떨어져 경쟁력 측면에서 위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렌 마틴스는 참가자 16명 중 유일하게 오직 의복의 기초인 선과 실루엣에 집중한 미니멀리즘을 선보였다. 결과는 수석 졸업이었다. 그가 전문적인 패션 디자인트레이닝을 받은 기간은 앤트워프 시절 4년이 전부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졸업 컬렉션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디자인은 매우 입체적인 실루엣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그 지점에서 앤트워프 왕립예술 학교 입학 전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마틴스의 독특한 이력이 확연히 드러난다.
입체적인 실루엣에 입각한 마틴스의 선율은 와이프로젝트 디렉터로 부임하기 전, 2012년부터 2013년까지 3개의 컬렉션을 발표한 그의 동명 레이블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마지막으로 글렌 마틴스 레이블에서 발표한 2013시즌 가을 컬렉션에서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떠오른다. 이러한 정교한 볼륨 설계는 마틴스가 유년기를 보낸 벨기에 브뤼헤(Bruges)의 중세시대 건물들과 15세기에서 16세기 벨기에에서 활동한 폴랑드르파 작가들의 미술 작품들 보고 자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고딕 미니멀리즘(실제로 마틴스는 당시 컬렉션을 그렇게 지칭하였다)과 더불어 마틴스의 초기 컬렉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실루엣의 트위스트를 통해 선보인 유틸리테리안(Utilitarian) 디자인이다. 팔 안쪽에 커팅을 더한 테일러드 하프 자켓, 발끝까지 닿는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활용한 트롱프뢰유 드레스 등은 그가 초기 컬렉션에서부터 클래식에 위트를 더해 자신만의 미니멀리즘을 완성해 나갔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신생레이블 와이프로젝트의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마틴스의 실험적인 실루엣 디자인은 꽃을 피웠다. 사실 마틴스 부임 이전의 와이프로젝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험적인 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 보이스를 지닌, 어떻게 보면 현재 고딕 패션의 선구자인 릭 오웬스에 더 가까운 브랜드였다. 자신과 전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레이블에 입성한 마틴스는 기존 남성복 라인의 리브랜딩에 집중하는 한편, 새롭게 추가된 여성복 라인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와이프로젝트 데뷔 런웨이 컬렉션에서 보여준 무거운 분위기의 남성복과는 달리 마틴스의 여성복 라인은 루즈한 실루엣과 부드러운 텍스처의 조화를 선보였다. 이와 더불어 정교한 설계로 완성된 입체적 실루엣의 컷아웃 스커트와 같은 섹슈얼한 아우라와 한결 ‘유스틱(Youth-tic)’해진 이미지는 단조로웠던 와이 프로젝트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맞이한 2016시즌 컬렉션에서 마틴스는 리브랜딩의 종료를 알림과 동시에 드디어 세상에 ‘글랜 마틴스의 와이프로젝트’를 선보이며 패션씬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그간 억눌렸던 욕구를 한풀이하듯, 과감한 컷아웃과 의복의 해체를 비롯해 현재 와이프로젝트의 헤리티지로 자리잡은 아방가르드한 데님웨어를 선보여 자신의 창의성을 분출하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극소수의 컬트 팔로잉을 지녔던 파리의 작은 레이블은 마틴스의 도착과 함께 파리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하였다. 2017년 신인 패션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가장 영예로운 상 중 하나인 안담 어워즈를 마틴스가 수상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전히 마틴스의 디자인 코어는 변함없이 실루엣에 집중되어 있다. 2016년부터 가장 최근에 발표된 2022년 가을 컬렉션까지, 와이프로젝트의 런웨이 룩들은 일견 맥시멀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개별 피스들이 맥시멀한 것이 아니라, 개별 피스들이 레이어드 되면서 생긴 오해다. 결국 본질로 돌아간다면 마틴스의 와이프로젝트가 엄청난 호평을 받았던 것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Envelope Dress와 같은 새로운 디자인의 창조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Originality를 비틀어 데님과 같은 하나의 장르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혹시 입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가 있는 옷을 접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와이프로젝트를 구매하면 전자기계 사용 설명서와 같은 책자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와이프로젝트를 한 번이라도 구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룩북에서 보았던 연출을 어떻게 해야 구현할 수 있을지 몰라 택에 달린 연출 사진을 봐가며 실험 아닌 실험을 해본 난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마틴스의 정교한 건축학적 디자인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특정한 무드 혹은 자리를 위해 옷을 맞춰가며 입는다. 그러나 마틴스의 옷은 디자이너가 디자인이라는 명목 아래 ‘설계한’ 테두리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피스로 본인이 원하는 무드에 따라 실루엣을 변형하며 다양하게 연출하는 것이다. 정적인 설계가 아닌 동적인 디자인을 통해 개성의 표현을 자유롭게 한다는 면에서 individualism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그렇다, 마틴스의 디자인은 언제, 어디서든 입을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무드에 따라 버튼 혹은 내제된 와이어로 언제든지 볼륨을 변형시킬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Ready to Wear’가 아니겠는가?
10명도 채 안 되는 파리의 작은 레이블로 시작한 와이프로젝트는 글렌 마틴스의 합류와 함께 전세계 100여개가 넘는 편집샵에 입점하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틴스가 진정으로 패션씬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 것은 올해 파리패션위크에서 선보인 장 폴 고티에 꾸뛰르 컬렉션의 성공으로 명확해졌다. 젊은 세대들과 아시아 시장의 럭셔리 패션에 대한 수요 증가와 맞물려 꾸뛰르 컬렉션이 받는 관심이 과거에 미치지는 못한다. 게다가 기계식 생산이 아닌 재단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측면에서 복식에 대한 이해도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에, Ready to Wear 만을 진행했던 디자이너들에게는 꾸뛰르 컬렉션을 전개하는 것이 양날의 검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게다가 드레스, 턱시도와 같은 고급 재단복을 만드는 오뜨 꾸뛰르 특성상 기성복에 비해 자유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혁신적인 디자인을 진행해왔던 디자이너들이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기에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마틴스는 과거 와이프로젝트 컬렉션에서 꾸뛰르적인 요소들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를 대표하는 입체적인 실루엣과 왜곡된 볼륨은 꾸뛰르에 가까운 정교한 재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틴스의 꾸뛰르 컬렉션이 성공할 수밖에 없던 또 하나의 이유는 장 폴 고티에 아래 주니어 디자이너로서 근무한 경험이 있기에 그 누구보다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기도 하다. 고티에 고유의 색채를 자신의 디자인 보이스를 통해 재해석한 마틴스의 컬렉션은 과거 장 폴 고티에의 파격적인 디자인에 빠졌던 이들이 향수에 젖기 충분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라는 격언은 모두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나뭇잎이라는 외벽을 걷어 숲의 본질인 나무 자체를 바라 보아야 할 때도 있다. 즉 패치워크와 같은 부수적으로 첨가된 것이 아니라 의복의 본질적 형태를 결정하는 실루엣에 초점을맞출 필요가 있다. 글렌 마틴스의 디자인이 그렇다. 어깨에 부착된 싱글 코트 라펠, 왜곡된 지퍼라인, 2-3개의 카라까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이들은 ‘이상한’, ‘괴이한’과 같은 표현들로 마틴스를 평가한다. 동의한다. 마틴스의 컬렉션은 전형적인 기성복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한 앙드레 꾸레주의 미니스커트, 혹은 크리스티안 디올의 바 자켓도 당시에는 혁명과도 같은 디자인이었다. 그들이 현재 전설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미 존재하는 복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글렌 마틴스의 색채도 이들과 같다. 마틴스의 디자인은 분명 신체적 한계에 갇혀 있던 컨템포러리 패션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첨단 과학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운 패브릭 혹은 그간 보지 못했던 의상의 발명이 아닌, 오직 선과 실루엣의 변형을 통해 말이다. 누군가 패션디자이너로서 성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주저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Bend it like Martens.
© Royal Academy of Fine Art Antwerp 2008 Graduation Collection, Trendland, Ani Tzencova / Glenn Martens Fall 2013 Ready to Wear Collection, WWD /© Y/Project Fall 2021 Ready to Wear Collection, Y/Project, Giovanni Giannoni
그렇다, 마틴스는 필자에게 항상 다음 컬렉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디자이너다. 그는 디젤 컬렉션으로 그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쇠퇴의 길을 걷던 레이블에 다시 섹시함과 쿨함을 되찾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티셔츠와 데님 재고를 해체하고 재건하여 만든 롱 스커트와 오버사이즈 데님팬츠들은 꾸뛰르에 가까운 정교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마틴스는 마치 누구도 데님에 대한 자신의 창의성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듯, 데님 디자인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디젤의 가을 컬렉션은 레이블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쇼임과 동시에 마틴 마르지엘라, 이브 생로랑과 같은 희대의 디자이너 반열에 글렌 마틴스가 오르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글렌 마틴스는 어떤 디자이너인가? 그가 와이프로젝트에서 보여준 과장된 볼륨감과 각기 다른 의상의 하이브리다이징을통해 표현된 레이어드 룩으로 대표되는 맥시멀리스트인가? 아니다, 글렌 마틴스의 디자인 보이스는 미니멀리즘이며 그는 현재 미니멀리즘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 패션이 무엇인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최소한을 뜻하는 ‘minimal’에서 알 수 있듯이 미니멀리즘은 필수적인 요소들 외 부가적인 모든 것들을 제외해 본질만을 남기는 것을 추구하는 예술사조다. 사람들이 흔히 ‘무난한’, ‘깔끔한’이라는 표현과 함께 미니멀리즘이라 일컫는 것은 미니멀리즘 패션과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슬랙스, 배바지, 블레이저로 대표되는 ‘남친룩’ 조합을 미니멀리즘과 혼동하여 사용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답습하는 안타까운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성의 없이 주장하는 ‘미니멀리즘’은 어떠한 개성도 없이 지루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패션을 멋스러운 단어 하나로 애써 포장하는 노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Quiet but Powerful’, 결국 본질에 중점을 둔 미니멀리즘이 패션으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캔버스 위에 색상, 실루엣 등을 끼얹어 자기만의 색깔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미니멀리즘의 정의로 돌아가면 의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가장 강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선(line), 즉 의복의 실루엣이다. 동일한 2장의 셔츠도 숄더라인의 길이와 부피, 그리고 허리라인의 차이로 완전히 다른 무드의 디자인이 되듯, 디자인의 외형적인 결과물에 있어서 의복의 실루엣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주어진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인위적인’ 비율 조작으로 가장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실루엣을 선보이고 있는 글렌 마틴스는 미니멀리즘 패션의 정점에 있다.
마틴스의 디자인 보이스가 미니멀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2008년 앤트워프 왕립 예술 학교 졸업 컬렉션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신인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어필하여 눈도장을 찍는 것이 중요한 졸업 컬렉션에서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은 임팩트가 떨어져 경쟁력 측면에서 위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렌 마틴스는 참가자 16명 중 유일하게 오직 의복의 기초인 선과 실루엣에 집중한 미니멀리즘을 선보였다. 결과는 수석 졸업이었다. 그가 전문적인 패션 디자인트레이닝을 받은 기간은 앤트워프 시절 4년이 전부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졸업 컬렉션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디자인은 매우 입체적인 실루엣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그 지점에서 앤트워프 왕립예술 학교 입학 전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마틴스의 독특한 이력이 확연히 드러난다.
입체적인 실루엣에 입각한 마틴스의 선율은 와이프로젝트 디렉터로 부임하기 전, 2012년부터 2013년까지 3개의 컬렉션을 발표한 그의 동명 레이블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마지막으로 글렌 마틴스 레이블에서 발표한 2013시즌 가을 컬렉션에서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떠오른다. 이러한 정교한 볼륨 설계는 마틴스가 유년기를 보낸 벨기에 브뤼헤(Bruges)의 중세시대 건물들과 15세기에서 16세기 벨기에에서 활동한 폴랑드르파 작가들의 미술 작품들 보고 자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고딕 미니멀리즘(실제로 마틴스는 당시 컬렉션을 그렇게 지칭하였다)과 더불어 마틴스의 초기 컬렉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실루엣의 트위스트를 통해 선보인 유틸리테리안(Utilitarian) 디자인이다. 팔 안쪽에 커팅을 더한 테일러드 하프 자켓, 발끝까지 닿는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활용한 트롱프뢰유 드레스 등은 그가 초기 컬렉션에서부터 클래식에 위트를 더해 자신만의 미니멀리즘을 완성해 나갔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신생레이블 와이프로젝트의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마틴스의 실험적인 실루엣 디자인은 꽃을 피웠다. 사실 마틴스 부임 이전의 와이프로젝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험적인 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 보이스를 지닌, 어떻게 보면 현재 고딕 패션의 선구자인 릭 오웬스에 더 가까운 브랜드였다. 자신과 전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레이블에 입성한 마틴스는 기존 남성복 라인의 리브랜딩에 집중하는 한편, 새롭게 추가된 여성복 라인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와이프로젝트 데뷔 런웨이 컬렉션에서 보여준 무거운 분위기의 남성복과는 달리 마틴스의 여성복 라인은 루즈한 실루엣과 부드러운 텍스처의 조화를 선보였다. 이와 더불어 정교한 설계로 완성된 입체적 실루엣의 컷아웃 스커트와 같은 섹슈얼한 아우라와 한결 ‘유스틱(Youth-tic)’해진 이미지는 단조로웠던 와이 프로젝트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맞이한 2016시즌 컬렉션에서 마틴스는 리브랜딩의 종료를 알림과 동시에 드디어 세상에 ‘글랜 마틴스의 와이프로젝트’를 선보이며 패션씬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그간 억눌렸던 욕구를 한풀이하듯, 과감한 컷아웃과 의복의 해체를 비롯해 현재 와이프로젝트의 헤리티지로 자리잡은 아방가르드한 데님웨어를 선보여 자신의 창의성을 분출하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극소수의 컬트 팔로잉을 지녔던 파리의 작은 레이블은 마틴스의 도착과 함께 파리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하였다. 2017년 신인 패션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가장 영예로운 상 중 하나인 안담 어워즈를 마틴스가 수상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전히 마틴스의 디자인 코어는 변함없이 실루엣에 집중되어 있다. 2016년부터 가장 최근에 발표된 2022년 가을 컬렉션까지, 와이프로젝트의 런웨이 룩들은 일견 맥시멀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개별 피스들이 맥시멀한 것이 아니라, 개별 피스들이 레이어드 되면서 생긴 오해다. 결국 본질로 돌아간다면 마틴스의 와이프로젝트가 엄청난 호평을 받았던 것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Envelope Dress와 같은 새로운 디자인의 창조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Originality를 비틀어 데님과 같은 하나의 장르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혹시 입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가 있는 옷을 접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와이프로젝트를 구매하면 전자기계 사용 설명서와 같은 책자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와이프로젝트를 한 번이라도 구매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룩북에서 보았던 연출을 어떻게 해야 구현할 수 있을지 몰라 택에 달린 연출 사진을 봐가며 실험 아닌 실험을 해본 난해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마틴스의 정교한 건축학적 디자인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특정한 무드 혹은 자리를 위해 옷을 맞춰가며 입는다. 그러나 마틴스의 옷은 디자이너가 디자인이라는 명목 아래 ‘설계한’ 테두리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피스로 본인이 원하는 무드에 따라 실루엣을 변형하며 다양하게 연출하는 것이다. 정적인 설계가 아닌 동적인 디자인을 통해 개성의 표현을 자유롭게 한다는 면에서 individualism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그렇다, 마틴스의 디자인은 언제, 어디서든 입을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무드에 따라 버튼 혹은 내제된 와이어로 언제든지 볼륨을 변형시킬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Ready to Wear’가 아니겠는가?
10명도 채 안 되는 파리의 작은 레이블로 시작한 와이프로젝트는 글렌 마틴스의 합류와 함께 전세계 100여개가 넘는 편집샵에 입점하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틴스가 진정으로 패션씬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 것은 올해 파리패션위크에서 선보인 장 폴 고티에 꾸뛰르 컬렉션의 성공으로 명확해졌다. 젊은 세대들과 아시아 시장의 럭셔리 패션에 대한 수요 증가와 맞물려 꾸뛰르 컬렉션이 받는 관심이 과거에 미치지는 못한다. 게다가 기계식 생산이 아닌 재단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측면에서 복식에 대한 이해도가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에, Ready to Wear 만을 진행했던 디자이너들에게는 꾸뛰르 컬렉션을 전개하는 것이 양날의 검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게다가 드레스, 턱시도와 같은 고급 재단복을 만드는 오뜨 꾸뛰르 특성상 기성복에 비해 자유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혁신적인 디자인을 진행해왔던 디자이너들이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기에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마틴스는 과거 와이프로젝트 컬렉션에서 꾸뛰르적인 요소들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를 대표하는 입체적인 실루엣과 왜곡된 볼륨은 꾸뛰르에 가까운 정교한 재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틴스의 꾸뛰르 컬렉션이 성공할 수밖에 없던 또 하나의 이유는 장 폴 고티에 아래 주니어 디자이너로서 근무한 경험이 있기에 그 누구보다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기도 하다. 고티에 고유의 색채를 자신의 디자인 보이스를 통해 재해석한 마틴스의 컬렉션은 과거 장 폴 고티에의 파격적인 디자인에 빠졌던 이들이 향수에 젖기 충분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라는 격언은 모두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나뭇잎이라는 외벽을 걷어 숲의 본질인 나무 자체를 바라 보아야 할 때도 있다. 즉 패치워크와 같은 부수적으로 첨가된 것이 아니라 의복의 본질적 형태를 결정하는 실루엣에 초점을맞출 필요가 있다. 글렌 마틴스의 디자인이 그렇다. 어깨에 부착된 싱글 코트 라펠, 왜곡된 지퍼라인, 2-3개의 카라까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이들은 ‘이상한’, ‘괴이한’과 같은 표현들로 마틴스를 평가한다. 동의한다. 마틴스의 컬렉션은 전형적인 기성복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한 앙드레 꾸레주의 미니스커트, 혹은 크리스티안 디올의 바 자켓도 당시에는 혁명과도 같은 디자인이었다. 그들이 현재 전설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미 존재하는 복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글렌 마틴스의 색채도 이들과 같다. 마틴스의 디자인은 분명 신체적 한계에 갇혀 있던 컨템포러리 패션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첨단 과학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운 패브릭 혹은 그간 보지 못했던 의상의 발명이 아닌, 오직 선과 실루엣의 변형을 통해 말이다. 누군가 패션디자이너로서 성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주저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Bend it like Martens.
© Royal Academy of Fine Art Antwerp 2008 Graduation Collection, Trendland, Ani Tzencova / Glenn Martens Fall 2013 Ready to Wear Collection, WWD /© Y/Project Fall 2021 Ready to Wear Collection, Y/Project, Giovanni Giann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