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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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도기유

                                       

레이 가와쿠보川久保玲의 옷은 정말 멋있고 아름답지만, 솔직히 쇼는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옷에만 집중하라는 강요처럼, 완벽한 고요함이 자아내는 일종의 압력은 가로 15인치 남짓의 컴퓨터 화면으로 봐도 생생히 느껴질 정도이다. 전시장 같은 분위기의 쇼도 좋지만, 그걸 졸지 않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레이 가와쿠보의 쇼이기 때문 아닐까. 멋진 음악, 신나는 비트, 그리고 쇼의 컨셉에 알맞은 모델의 몸짓과 춤은 더군다나 멋진 쇼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좋은 재료다.

원래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등장 이전의 패션쇼는 음악과 퍼포먼스 없이 옷만 감상해야 하는 컬렉션 프레젠테이션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브 생 로랑의 FW 1976 컬렉션이 사상 최초로 음악과 퍼포먼스를 활용하며, 패션쇼는 음악과 춤과 같은 연극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후 1990년대 런던에서 등장한 디자이너들, 특히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과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는 패션쇼에서 단순한 의류 판매 플랫폼 이상의 가능성을 인식했다. 그들은 춤, 음악, 시네마를 포함한 몰입을 창조해내며, 옷 외부의 요소들이 본래적인 옷의 영역을 넘나드는 ‘연극적 쇼theatrical show’의 본보기를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알렉산더 맥퀸의 광기 어린 SS 2004에서의 무도회부터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댄스 퍼포먼스의 정수를 보여준 RtW SS 2009까지. 패션 신에 길이 기억될 댄스 퍼포먼스들을 함께 회상하며, 퍼포먼스와 쇼 콘셉트과의 연관성, 퍼포먼스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한 소품이나 장치, 연출의도를 파헤쳐 보자. 또한, 근래 패션쇼에서 보여주고 있는 댄스 퍼포먼스들에 대해서도 다뤄보며, 최근 디지털화 및 원격화되어가고 있는 패션쇼의 흐름에 비추어 ‘춤’이 현재 패션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짚어보자.

길이 기억될 역사적 순간들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SS 2004 - 마라톤 댄스 경연 대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 Horses, Don’t They?>를 ‘맥퀸식 광기’로 드라마틱하게 재현했던 쇼. 오래되고 음산한 댄스홀의 디스코볼이 켜지더니 신나는 댄스 음악이 나오며 수많은 남녀 커플이 댄스 플로어에 등장한다. 이내 커플들은 음악에 맞춰 가지각색의 격정적인 춤을 추며 그들의 댄스복 -차차 드레스, 발레용 망사 스커트, 새틴 드레스 등- 을 힘껏 뽐낸다. 댄스 플로어 위의 에너지가 뜨겁게 팽창해가던 도중, 조명과 음악이 갑작스럽게 바뀌고 모델들은 미친 듯이 댄스 플로어를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화사한 시폰 드레스와 스포티브한 바디수트가 무대를 이리저리 오가며 광기에 찬 마라톤 댄스 경연을 떠오르게 한다. 다시 조명과 음악이 바뀌더니, 여성들이 만취한 것마냥 비틀거리며 짝과 춤추기 시작한다. 피날레를 장식한 은색 스팽글 드레스를 입은 모델은 아예 바닥에 쓰러져 누웠고, 맥퀸이 직접 무대에 나와끌고 갈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드러누워 있는다. 영화와 영화의 주제인 ‘춤’을 이용해 쇼에 분명한 내러티브를 부여하고, 또 그것이 차차 드레스, 발레복과같은 컬렉션의 피스들과 일맥상통한 성공적인 패션쇼다. 또한, 짜임새 있는 안무를 통해 광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했다는 점에서, 맥퀸의 SS 2004는 다방면적으로 의미 있는 춤의 활용을 보여준 연극적 쇼의 본보기다. 이후 이 쇼는 그 스티븐 마이젤Steven Meisel에게까지 영감을 줘, 보그 이탈리아에서 이를 오마주하기도 했다.




(좌) 오프닝, 코코 로샤Coco Rocha (우) 피날레, 코코 로샤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tier RtW FW 2007 - 코코 로샤에게 찾아온 '별의 순간'. 코코 로샤는 이 쇼의 오프닝과 피날레를 자신의 장기인 아이리시 댄스로 장식하며, 런웨이 위에서 자신이 고티에의 새로운 ‘뮤즈’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전직 아이리시 댄서인 코코 로샤의 능숙하고 통통 튀는 아이리시 댄스는 쇼에 생동감을 불어넣었고,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 아일랜드 민족 구성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일인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더의 직계 조상이다 - 라는 쇼의 에스닉 컨셉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줬다. 피날레 워킹에서 코코 로샤가 입었던 피스도 고티에에 의해 재해석된 켈트족의 상징적인 헤리티지, 타탄 킬트였다. 쇼의 시작과 끝에서, 쇼의 컨셉에 대한 정보를 게일계 모델인 코코 로샤를 통해 직구로 보여준 것이다. 이외에도 여우 털로 아름답게 치장된 겪자 무늬 타프타 드레스, 깃털 액세서리, 페이스마스크 등이 런웨이에 올라 고티에가 재해석한 하이랜드의 복식문화를 펼쳐 보여줬다.





고티RtW SS 2009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장 폴 고티에의 RtW SS 2009 쇼는 ‘춤’으로 그 시작과 끝을 이뤘다. 세 현대무용수의 현란한 댄스 퍼포먼스로 시작된 장 폴 고티에의 오프닝쇼는 컬렉션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은 일종의 트레일러였다. ‘아웃웨어로서의 이너웨어Innerwear as Outwear’라는 쇼의 모티브에 맞게 무용수들은 자유분방한 안무를 선보였고, 무용수들이 입은 브래지어와 브리프,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도록 절개된 드레스 등은 고티에가 이번 쇼에서 무엇을 보여줄지에 대해 예고하였다. 댄스 퍼포먼스 도중 붉은색의 드레스를 걸친 코코 로샤가 등장해 무용수들과 함께 안무를 선보이며 쇼의 공식적인 오프닝을 알렸다. 코코 로샤는 댄스 플로어에서 런웨이로 이동하며 드레스의 끈을 풀었고, 이내 배면을 덮고 있던 천이 풀리며 드레스가 레오타드임을 보여주었다. 코코 로샤를 비롯해, 이후 등장한 모델들은 모두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을 연상시키는 정돈된 헤어스타일로 런웨이에 올랐고, 이는 무용의 고정관념을 깨고 현대 무용을 개척한 그녀의 위업을 소환하며 쇼의 전복적인 모티브를 돋보이게 했다. 피날레의 순간이 오자, 마사 그레이엄을 모방한 모델들이 정렬한 가운데 무용수들이 다시 등장해 댄스 퍼포먼스를 펼치기 시작했다. 쇼의 모티브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때려 박으려는 듯, 격렬하게! 그리고 전복적이게!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쇼의 새로운 페이즈를 연 순간들
코비드 19 이후 패션쇼의 디지털화 및 원격화가 가속되며 시각적 어트랙션과 고밀도의 구성, 그리고 내러티브가 쇼의 중요한 부분으로 부상했다. 공간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실제 런웨이에서 보이는 쇼의 아우라는 뒷순위로 밀려나고, ‘화면 상으로 보이는’ 재미와 감동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느슨해진 시공간적 제약은 연출과 구성, 그리고 내러티브 활용의 자유도를 확대했고, 동시에 세 요소가 쇼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했다. 앞으로 소개할 두 쇼는 ‘춤’이 어떻게 이 세 요소를 확보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활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다.



드리스 반 노튼 Dries Van Noten FW 2021 - 드리스 반 노튼의 2021년 FW 컬렉션은 조금은 톤다운 되어 있었다. 휘황찬란한 시폰 드레스도 없었고, 파격적이거나 화려한 패턴의 등장도 없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만 남긴, 가장 미니멀한 드리스 반 노튼이었다. 락다운의 시대, 춤추러 나갈 수도 없고, 사람들과 포옹할 수도 없는 팬데믹 시국의 우울감을 반영한 것이었을까? 당해 드리스 반 노튼 쇼의 특징은 라이브쇼가 아니라 사전에 촬영한 동영상이라는 점에 있다. 기존의 패션쇼처럼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워킹을 하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디오 아트처럼 트랜지션을 반복하며 춤을 추는 모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면 관중이 없다는 점, 그리고 사후 편집이 가능하다는 점 덕분에 모델들은 긴 호흡의 절제된 안무를 소화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드리스 반 노튼은 ‘움직임’의 제한에서 비롯된 현실의 스트레스를 절제돼있으면서도 감정선이 실린 몸의 ‘움직임’으로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고, 이는 시청자들에게 춤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몰입감을 제공했다.




준야 와타나베 맨 Junya Watanabe Man FW 2022 - 자미로콰이Jamiroquai의 ‘Virtual Insanity’에 대한 준야 와타나베의 공식적인 오마주. 촬영 스튜디오부터 모델들의 안무, 그리고 백그라운드 뮤직까지, 준야 와타나베의 FW 2022 미니쇼는 ‘Virtual Insanity’의 뮤직비디오를 닮아 있었다. 이 컬렉션에서는 멕시칸 전통 의상 세라페Serape, 나바호족Navajo의 담요 패턴 등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 레퍼런스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자미로콰이의 리더 제이 케이Jay Kay가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를 무대 의상과 밴드의 정체성으로서 활용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형형색색의 세라페, 아메리카 원주민 전통 패턴으로 장식된 패치워크 재킷과 데님 팬츠는 폭넓은 레퍼런스 활용 능력과 패치워크 베리에이션이라는 준야 와타나베의 강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상의에는 오버사이즈 코트와 파카를, 하의에는 스키니진을 배치하며 90년대의 큰 상의-스키니한 하의의 복고적 실루엣을 다시 호명한 것도 자미로콰이에 대한 훌륭한 오마주이자 이번 컬렉션의 매력 포인트였다. 안무는 ‘Virtual Insanity’의 촐싹거리는 안무와 거의 유사했다. 바닥이 움직이는 듯한 ‘Virtual Insanity’의 CG 효과를 힐리스를 타고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는 오프닝 모델의 등장 씬으로 연출한 장면은 조금 코믹했다. 정해진 촬영 스튜디오와 영상 편집을 동원한 디지털 쇼이기에 가능했던, 하나의 뮤직비디오 같았던 경쾌한 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