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ying Gravity
WEBZINE
WEDITOR 정재현
케이트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
서양권 여성 배우들의 일군을 통칭하는 비유들 중엔 '옆집에 사는 소녀The Girl Next Door'라는 수식어가 있다. 별세계 할리우드보단 우리 동네에 살 것 같은 친근하고 편안한 매력을 지닌 배우들에게 주로 붙던 표현이다. 해당 계의 조직원으로는 샌드라 불럭, 제니퍼 애니스톤, 제니퍼 가너 등이 거명되지만 이들을 떠올리면 해당 표현이 은닉한 불편한 진실 몇 가지를 이내 상기하곤 한다. 우리 동네엔 사실 저런 이들이 살지 않을 거란 만연한 사실 하나, 우리 동네에 저들이 존재하려면 내가 먼저 키아누 리브스, 데이빗 쉼머, 벤 애플렉이어야 한다는 서글픈 진리 둘.
위의 표현을 조금 변형해 케이트 윈슬렛(1975.10.5~)의 연기를 말하자면 '거기에 사는 여자' 정도가 될 터다. 윈슬렛의 연기가 지닌 지극한 현실감은 그를 정말 그곳에 사는 사람으로 비치게 한다. 윈슬렛은 “어떻게 이 배역을 연기했나요?” 류의 질문에 진짜(authencity)를 표하고 싶었다 말한다. 윈슬렛은 남용으로 진의가 퇴색한 진정성, 진실, 진짜와 같은 단어를 연기로 현현하며 오래된 잠언처럼 보이는 가치들을 그의 연기만으로 맹신하게 한다. 진짜 거기에 사는 여자 윈슬렛은 두 발을 땅에 딱 붙이고 서 있다. 하지만 그가 연기하는 배역들은 끊임없이 중력을 거부한다. 세상은 연직 방향으로 윈슬렛을 거친 여성들을 묶어두려 하지만 윈슬렛은 달아나려 한다. 그 여자는 거기 살지만, 또 거기 살지 않는다.
코스튬과 텍스트를 넘어 비상하는
케이트 윈슬렛의 필모그래피에는 사극이 많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극의 여성 주인공을 생각하면 귀족 가문 영양(令孃)이 제일 처음 떠오르지만 <타이타닉(1997)> 정도를 제외하면 윈슬렛이 몸담은 사극 속 여인들은 평범한 가정의 비범한 여식이다. 하지만 윈슬렛의 여성들은 시대가 아무리 여성들의 날개를 꺾더라도 다시 추락할지언정 찢긴 날개에 꾸역꾸역 밀랍을 녹여가며 이카루스의 비상을 시도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인습에 항거하며 기어이 시대가 강요하는 코르셋을 찢어발긴다.
<쥬드>
12세기 덴마크의 <햄릿(1996)>의 오필리어와 19세기 영국 <쥬드(1996)>의 수도 마찬가지다. 대개 고전 문학 속 남성 작가는 여성 캐릭터의 비극적 결말을 그릴 때 맥락없는 극단적 파멸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셰익스피어와 하디도 이 점에 있어 혐의를 벗지 못한다. 이들의 영화판도 소위 원작의 현대적 해석을 가미하지 않는다. 윈슬렛의 오필리어와 수는 그 결말이 관습으로 맺어질지언정 스크린에 존재하는 동안만은 놀랍도록 생생한 존재로서 화면 내에 버티고 비극으로 치닫으며 빤해지는 캐릭터에게 실감이라는 찢기지 않는 막을 덧입힌다. 연정을 가진 남자가 아버지를 살해했음을 알고 미쳐버린 여자, 세간의 시선을 피해 사촌과의 사랑을 택하는 여자도 윈슬렛을 만나면 선택에 당위가 생기고 그들의 선택에 주체의 의지 개입이 분명해진다. 이는 윈슬렛만의 배역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정통 셰익스피어 배우인 케네스 브래너의 연출작에 상대역으로 출연하는 것보다 윈슬렛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던 것은 (그의 표현을 빌어) '마치 외국어같은 셰익스피어의 공포스런 대사'였다. 그래서 윈슬렛은 정서에 집중했다. 최대한 오필리어의 실연(失戀) 상태를 비수로 만들어 관객 마음에 꽂아 넣을 태세를 채비했고, 햄릿이 왜 오필리어를 사랑했는지 역산하여 오필리어가 햄릿만큼 강인한 사람일 것이라는 결론을 연기에 반영했다. <쥬드>의 수 브라이드헤드 또한 윈슬렛의 해석을 만나 훨씬 다면적인 인물로 변했다. 어떤 배역이든 원작 소설이 있다면 오리지널 텍스트를 독파하는 것으로 캐릭터 분석을 시작하는 윈슬렛의 오랜 습성과 달리, 윈슬렛은 『무명의 주드』 읽기를 포기했다. 원작 속 수가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윈슬렛은 우연에 노출한 채 그 자신으로 카메라 앞에 서길 택했다. 윈슬렛 버전의 수는 거의 아니키스트에 가깝다. 한 개비의 담배만 있다면 어디서든 살 궁리는 할 수 있는 여성이고, 둘의 사랑에 정부의 허가가 왜 필요한지 고찰하는 여성이다. 혹자는 작품들에서의 윈슬렛의 연기가 원작-모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윈슬렛의 재해석은 남성 프로타고니스트의 기분 혹은 구색을 맞추고 그의 각성을 위해 소모된 후 산화하는 크로키 수준의 여성 캐릭터들에게 정당성을 소묘한다. 그리고 그들을 '여'주인공이 아닌 엄연한 주체로 부조(浮彫)하며 오로지 자신의 연기만으로 충분히 구태한 원작을 모독할 근거를 마련한다.
Frankly-my-dear
자유와 충동. 2-30대의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배역들이 내일 세상이 종말한대도 사수하던 가치들이다. 윈슬렛의 출세작인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의 매리앤은 이성(sense)과 감성(sensibility) 중 당연히 감성을 담당한다. 객식구 에드워드(휴 그랜트 분)의 셰익스피어 낭독에 “절망이 느껴지게 좀 읽어봐요”라고 어깃장을 놓고, 불타는 마음을 너무 표현하지 말라는 언니 엘리노어(엠마 톰슨 분)의 충고에 “내 마음을 왜 숨겨야 하지?”라며 맞불을 놓는 여자다. 서사시 속 불타오르는 사랑을 동경하며 “사랑을 위한 죽음! 그보다 더 숭고한 게 어딨겠어!”라며 볼을 붉히는 매리앤은 이별을 겪은 후 빗속에 스스로를 내버리다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다녀온다.
<아이리스(2001)> 속 젊은 아이리스 머독은 1950년대 영국에서 자유로워지는 법과 선해지는 법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고민하는 당당한 철학가다. 아이리스는 고심과 연구의 결과를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는 성적 편력으로 실험한다. 윈슬렛의 연기는 아이리스의 분방함을 육화해 아이리스가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 자체를 체화한 사람으로 납득하게 한다. 아이리스 머독을 향한 윈슬렛의 해석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소심한 애인 존(휴 보너빌 분)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윈슬렛의 아이리스는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운 자신에 관해 확신해 차 역설하지만 상처를 주는 자신을 향한 죄책감과 상처를 받을 존을 향한 연민 또한 품고 있다. 윈슬렛은 한 시퀀스 안에서 이 모두를 발산하는 복합적 연기를 선사한다. 인간은 다종하고 다면적이며 복합적이란 말은 주로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끝끝내 수용하기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사용되곤 한다. 윈슬렛은 그 진리가 최후의 극약이 아닌 강인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존엄함의 표상임을 연기로 보인다. 윈슬렛이 생각하는 아이리스 머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여자'다. 아이리스에 대한 윈슬렛의 요약만큼 윈슬렛의 연기를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이터널 선샤인(2004)>의 클레멘타인은 마침내 윈슬렛이 21세기 들어 연기한 첫 21세기 인물이다. 윈슬렛이 클레멘타인에게 품는 애정은 상당하다. 클레멘타인은 윈슬렛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이자 윈슬렛이 생각하는 첫 번째 터닝포인트기 때문이다. <타이타닉>, <데이비드 게일(2003)>을 제외하면 윈슬렛은 이전까지 미국인을 연기한 적이 없다. 감독 미셸 공드리는 윈슬렛이 연기한 사극 속 여러 배역들에서 클레멘타인의 교집합을 발견해 그에게 클레멘타인을 맡아줄 것을 가장 처음 제의했다. 말하나마나 교집합의 원소는 자유와 충동일 터다. 윈슬렛이 클레멘타인에 접근한 방식은 클레멘타인의 성정과 다를 바 없다. 사전조사를 통해 캐릭터를 구축하는 윈슬렛의 평소 준비 과정과 달리, 클레멘타인을 연기할 땐 자신을 언제든 즉흥 연기가 가능한 가단(可鍛)한 상태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헤테로섹슈얼 연애 관계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은 시대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윈슬렛의 여성들은 개인의 실존보다 도상과 덕목이 선행하는 관계에 언제나 의문을 품고 이에 저항한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는 교제 관계에 관해 늘 남성들에게 경고를 날린다. 조엘(짐 캐리 분)을 향한 클레멘타인의 천명은 그래서 통쾌하다. “나는 그냥 스스로의 평화가 필요한 X망한 여자일 뿐야. 나는 너에게 콘셉트가 될 생각도, 네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도 아냐.”
당신도 이 여자를 알고 있을 거예요
위의 중제는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한국 개봉 당시 씨네21 김혜리 편집위원이 붙인 20자평이다. 이 수식은 케이트 윈슬렛의 모든 배역 모든 영화에 갖다 붙인대도 손색없는 윈슬렛에 대한 한줄요약이기도 하다. 윈슬렛이 연기하는 여자는 그 어떤 극단에 처해 있든 우리가 모두 아는 여자다. 그리고 윈슬렛은 스크린과 TV에서 그 아는 여자를 관객과 시청자가 자신을 통해 발견할 수 있길 누구보다 바란다.
윈슬렛의 커리어 최고 연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프릴은 의미없는 삶을 지속하며 위선 속에 사느니 차라리 산화해 버릴 것을 택하는 여자다. 에이프릴이 생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그건 포기일 터다. 매 삶을 사는 것처럼 살고 싶은 에이프릴은 “의미있게 사는 것이 미친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미칠 것이다”라며 멸렬한 삶을 타개할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를 자신과 공동으로 삶을 꾸려가는 남편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가 언제나 동조해 주었으면 하는 의사를 내비친다. 당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민하는 기혼 여성에게 멋진 남편과 멋진 집, 귀여운 아이가 있는데 복에 겨운 소릴 한다며 타박을 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가슴 한 켠에 '노라'를 품은 대부분의 여성들 또한 알고 있다.
윈슬렛의 근작 <암모나이트(2020)>의 애닝 박사와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2021)>의 메어 경감은 윈슬렛이 추구하는 진짜로 보이기(Being-Real)를 그대로 수행한 성공사례다. 윈슬렛은 상당한 노출이 있는 애닝 박사를 연기하면서 살을 빼지 않았다. 또한 메어 경감의 베드신에서 뱃살 장면을 편집한 제작진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리기도 했으며(윈슬렛은 이 드라마의 제작자기도 하다) 포스터에 실릴 메어의 사진에 포토샵 보정이 절대 들어가면 안된다 강경히 주장했다. 윈슬렛에 따르면 18세기 40대 여성인 애닝의 누드는 당시 40대만큼 착실히 세월을 보낸 자의 투지가 있어야 했다. 메어의 주름과 살에서 메어가 싸워 온 삶의 기록이 그대로 드러나길 바랐다. <타이타닉>의 유명세 이래 윈슬렛은 언제나 체중 이슈와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미디어의 몸매 조롱(Body Shaming)에 관해 언제나 목소리를 높인다. 윈슬렛은 여성들이 획일화된 미적 기준과 성공을 동치하는 것을 배우로서, 셀러브리티로서 꾸준히 경고한다. 랑콤의 모델일 땐 계약 조건에 몸매 보정과 주름 보정을 금지할 것을 명시하였고, 로레알 앰배서더로 활동할 땐 여성의 자아존중 독려 캠페인 영상을 찍으며 클렌징워터로 자기 얼굴의 화장을 벅벅 지웠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이하 더 리더->의 한나 슈미츠와 <스티브 잡스(2015)>의 조안나 호프먼이 구현하는 진짜의 속성은 그들이 남성 주체의 상대역임에도 그들이 영화에서 선점하는 주체성에서 발원한다. 한나는 마이클(레이프 파인즈 분)의 인생 전반에, 조안나는 스티브 잡스(마이클 파스빈더 분)의 인생에 중요한 몇 번의 프레젠테이션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궁극적으로 한나와 조안나는 서사의 비중을 보면 분명한 조연이고, 남성 주체의 각성을 돕는 인물이다. 하지만 윈슬렛이 연기한 한나와 조안나는 소비되는 느낌이 적다. 이는 윈슬렛이 보여주는 생생한 육체성에 기인한다. 윈슬렛의 연기는 관습적이고 한정적으로 사용하는 육체파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한다. <더 리더>에서 마이클 앞에서 브래지어를 턱하고 꺼낸 후 다리는 윈슬렛의 자세나 마이클이 목욕 중인 욕조에 첨벙첨벙 들어가는 윈슬렛의 태도는 한나를 관음하려는 카메라의 의도에 부합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스티브 잡스>에서 윈슬렛은 콸콸 용솟음치는 대사를 폴란드식 영어 억양으로 유려하게 소화해 다수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빼곡한 '대사'의 영화인(각본이 아론 소킨이다) <스티브 잡스>에서 윈슬렛의 조안나가 자기를 증명하는 방식도 의외로 육체연기라는 것이다. 폭압적으로 고집을 관철하는 잡스를 대하는 조안나의 태도는 굳건하다. 윈슬렛이 연기하는 조안나가 잡스의 말을 들을 때 서 있는 자세와 잡스에게 쏘아붙일 때의 몸짓을 보면, 조안나는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인 것만 같다. 절대 주눅 들지 않는 윈슬렛의 태도는 오히려 자신의 설득으로 잡스가 바뀔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육체로 표현한다. 온몸으로 세상의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윈슬렛의 연기는 발로 뛰며 팬데믹 역학 조사를 수행하는 <컨테이전(2011)>의 에린 박사에게도,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지만 사랑을 믿고 싶어 하는 <로맨틱 홀리데이(2006)>의 아이리스에게도, 눈 덮인 유타 산에 조난돼 생존을 도모하는 <우리 사이의 거대한 산(2017)>의 알렉스에게도 살아있다.
윈슬렛의 차기작은 <아바타: 물의 길(2022)>과 2차 세계대전 종군 사진기자 리 밀러의 실화를 다룬 <리>다. 지구의 중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던 그는 지금 판도라에서, 1950년대에서 끊임없이 세상과 싸우며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여자들을 기어이 우리가 아는 그 여자로 현현해 낼 것이다.
서양권 여성 배우들의 일군을 통칭하는 비유들 중엔 '옆집에 사는 소녀The Girl Next Door'라는 수식어가 있다. 별세계 할리우드보단 우리 동네에 살 것 같은 친근하고 편안한 매력을 지닌 배우들에게 주로 붙던 표현이다. 해당 계의 조직원으로는 샌드라 불럭, 제니퍼 애니스톤, 제니퍼 가너 등이 거명되지만 이들을 떠올리면 해당 표현이 은닉한 불편한 진실 몇 가지를 이내 상기하곤 한다. 우리 동네엔 사실 저런 이들이 살지 않을 거란 만연한 사실 하나, 우리 동네에 저들이 존재하려면 내가 먼저 키아누 리브스, 데이빗 쉼머, 벤 애플렉이어야 한다는 서글픈 진리 둘.
위의 표현을 조금 변형해 케이트 윈슬렛(1975.10.5~)의 연기를 말하자면 '거기에 사는 여자' 정도가 될 터다. 윈슬렛의 연기가 지닌 지극한 현실감은 그를 정말 그곳에 사는 사람으로 비치게 한다. 윈슬렛은 “어떻게 이 배역을 연기했나요?” 류의 질문에 진짜(authencity)를 표하고 싶었다 말한다. 윈슬렛은 남용으로 진의가 퇴색한 진정성, 진실, 진짜와 같은 단어를 연기로 현현하며 오래된 잠언처럼 보이는 가치들을 그의 연기만으로 맹신하게 한다. 진짜 거기에 사는 여자 윈슬렛은 두 발을 땅에 딱 붙이고 서 있다. 하지만 그가 연기하는 배역들은 끊임없이 중력을 거부한다. 세상은 연직 방향으로 윈슬렛을 거친 여성들을 묶어두려 하지만 윈슬렛은 달아나려 한다. 그 여자는 거기 살지만, 또 거기 살지 않는다.
코스튬과 텍스트를 넘어 비상하는
케이트 윈슬렛의 필모그래피에는 사극이 많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극의 여성 주인공을 생각하면 귀족 가문 영양(令孃)이 제일 처음 떠오르지만 <타이타닉(1997)> 정도를 제외하면 윈슬렛이 몸담은 사극 속 여인들은 평범한 가정의 비범한 여식이다. 하지만 윈슬렛의 여성들은 시대가 아무리 여성들의 날개를 꺾더라도 다시 추락할지언정 찢긴 날개에 꾸역꾸역 밀랍을 녹여가며 이카루스의 비상을 시도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인습에 항거하며 기어이 시대가 강요하는 코르셋을 찢어발긴다.
<퀼스>
<퀼스(2000)>의 매들린은 17세기 파리 정신병원의 하녀다. 매들린은 나폴레옹령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 사드 후작(제프리 러시 분)의 저서를 출판 시장에 밀납품한다. 매들린은 식자 능력이 생계와 무관한 여성임에도 쿨미어 신부(와킨 피닉스 분)로부터 읽고 쓰는 법을 열성적으로 배우고 이를 동료들과 나눈다. 그리고 낭독의 과정을 누구보다 즐긴다. 케이트 윈슬렛의 해석을 입은 매들린은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나, 한 예술가의 뮤즈로 협소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윈슬렛의 매들린은 엄연한 사드의 예술 동료이고, 사드의 예술을 머리로 이해하는 여성이다. 매들린은 쿨미어에게 금단의 마음을 품지만, 그가 쿨미어에게 품는 연정은 철저히 쿨미어의 지성과 쿨미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적 욕구 해소에 기인한다. 윈슬렛은 사드와 쿨미어가 매들린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매들린의 신분과 무관한 지성과 충만한 생명력에서 찾아내도록 표현한다.<쥬드>
Frankly-my-dear
자유와 충동. 2-30대의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배역들이 내일 세상이 종말한대도 사수하던 가치들이다. 윈슬렛의 출세작인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의 매리앤은 이성(sense)과 감성(sensibility) 중 당연히 감성을 담당한다. 객식구 에드워드(휴 그랜트 분)의 셰익스피어 낭독에 “절망이 느껴지게 좀 읽어봐요”라고 어깃장을 놓고, 불타는 마음을 너무 표현하지 말라는 언니 엘리노어(엠마 톰슨 분)의 충고에 “내 마음을 왜 숨겨야 하지?”라며 맞불을 놓는 여자다. 서사시 속 불타오르는 사랑을 동경하며 “사랑을 위한 죽음! 그보다 더 숭고한 게 어딨겠어!”라며 볼을 붉히는 매리앤은 이별을 겪은 후 빗속에 스스로를 내버리다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다녀온다.
<아이리스>
<아이리스(2001)> 속 젊은 아이리스 머독은 1950년대 영국에서 자유로워지는 법과 선해지는 법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고민하는 당당한 철학가다. 아이리스는 고심과 연구의 결과를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는 성적 편력으로 실험한다. 윈슬렛의 연기는 아이리스의 분방함을 육화해 아이리스가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 자체를 체화한 사람으로 납득하게 한다. 아이리스 머독을 향한 윈슬렛의 해석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소심한 애인 존(휴 보너빌 분)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윈슬렛의 아이리스는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운 자신에 관해 확신해 차 역설하지만 상처를 주는 자신을 향한 죄책감과 상처를 받을 존을 향한 연민 또한 품고 있다. 윈슬렛은 한 시퀀스 안에서 이 모두를 발산하는 복합적 연기를 선사한다. 인간은 다종하고 다면적이며 복합적이란 말은 주로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끝끝내 수용하기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사용되곤 한다. 윈슬렛은 그 진리가 최후의 극약이 아닌 강인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존엄함의 표상임을 연기로 보인다. 윈슬렛이 생각하는 아이리스 머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여자'다. 아이리스에 대한 윈슬렛의 요약만큼 윈슬렛의 연기를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2004)>의 클레멘타인은 마침내 윈슬렛이 21세기 들어 연기한 첫 21세기 인물이다. 윈슬렛이 클레멘타인에게 품는 애정은 상당하다. 클레멘타인은 윈슬렛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이자 윈슬렛이 생각하는 첫 번째 터닝포인트기 때문이다. <타이타닉>, <데이비드 게일(2003)>을 제외하면 윈슬렛은 이전까지 미국인을 연기한 적이 없다. 감독 미셸 공드리는 윈슬렛이 연기한 사극 속 여러 배역들에서 클레멘타인의 교집합을 발견해 그에게 클레멘타인을 맡아줄 것을 가장 처음 제의했다. 말하나마나 교집합의 원소는 자유와 충동일 터다. 윈슬렛이 클레멘타인에 접근한 방식은 클레멘타인의 성정과 다를 바 없다. 사전조사를 통해 캐릭터를 구축하는 윈슬렛의 평소 준비 과정과 달리, 클레멘타인을 연기할 땐 자신을 언제든 즉흥 연기가 가능한 가단(可鍛)한 상태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헤테로섹슈얼 연애 관계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은 시대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윈슬렛의 여성들은 개인의 실존보다 도상과 덕목이 선행하는 관계에 언제나 의문을 품고 이에 저항한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는 교제 관계에 관해 늘 남성들에게 경고를 날린다. 조엘(짐 캐리 분)을 향한 클레멘타인의 천명은 그래서 통쾌하다. “나는 그냥 스스로의 평화가 필요한 X망한 여자일 뿐야. 나는 너에게 콘셉트가 될 생각도, 네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도 아냐.”
당신도 이 여자를 알고 있을 거예요
<레볼루셔너리 로드>
위의 중제는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한국 개봉 당시 씨네21 김혜리 편집위원이 붙인 20자평이다. 이 수식은 케이트 윈슬렛의 모든 배역 모든 영화에 갖다 붙인대도 손색없는 윈슬렛에 대한 한줄요약이기도 하다. 윈슬렛이 연기하는 여자는 그 어떤 극단에 처해 있든 우리가 모두 아는 여자다. 그리고 윈슬렛은 스크린과 TV에서 그 아는 여자를 관객과 시청자가 자신을 통해 발견할 수 있길 누구보다 바란다.
윈슬렛의 커리어 최고 연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프릴은 의미없는 삶을 지속하며 위선 속에 사느니 차라리 산화해 버릴 것을 택하는 여자다. 에이프릴이 생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그건 포기일 터다. 매 삶을 사는 것처럼 살고 싶은 에이프릴은 “의미있게 사는 것이 미친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미칠 것이다”라며 멸렬한 삶을 타개할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를 자신과 공동으로 삶을 꾸려가는 남편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가 언제나 동조해 주었으면 하는 의사를 내비친다. 당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민하는 기혼 여성에게 멋진 남편과 멋진 집, 귀여운 아이가 있는데 복에 겨운 소릴 한다며 타박을 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가슴 한 켠에 '노라'를 품은 대부분의 여성들 또한 알고 있다.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 케이트 윈슬렛은 이 작품으로 <밀드레드 피어스>에 이은 두 번째 에미 주연상을 수상했다.
윈슬렛의 근작 <암모나이트(2020)>의 애닝 박사와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2021)>의 메어 경감은 윈슬렛이 추구하는 진짜로 보이기(Being-Real)를 그대로 수행한 성공사례다. 윈슬렛은 상당한 노출이 있는 애닝 박사를 연기하면서 살을 빼지 않았다. 또한 메어 경감의 베드신에서 뱃살 장면을 편집한 제작진에게 엄중한 경고를 날리기도 했으며(윈슬렛은 이 드라마의 제작자기도 하다) 포스터에 실릴 메어의 사진에 포토샵 보정이 절대 들어가면 안된다 강경히 주장했다. 윈슬렛에 따르면 18세기 40대 여성인 애닝의 누드는 당시 40대만큼 착실히 세월을 보낸 자의 투지가 있어야 했다. 메어의 주름과 살에서 메어가 싸워 온 삶의 기록이 그대로 드러나길 바랐다. <타이타닉>의 유명세 이래 윈슬렛은 언제나 체중 이슈와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미디어의 몸매 조롱(Body Shaming)에 관해 언제나 목소리를 높인다. 윈슬렛은 여성들이 획일화된 미적 기준과 성공을 동치하는 것을 배우로서, 셀러브리티로서 꾸준히 경고한다. 랑콤의 모델일 땐 계약 조건에 몸매 보정과 주름 보정을 금지할 것을 명시하였고, 로레알 앰배서더로 활동할 땐 여성의 자아존중 독려 캠페인 영상을 찍으며 클렌징워터로 자기 얼굴의 화장을 벅벅 지웠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케이트 윈슬렛의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작이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이하 더 리더->의 한나 슈미츠와 <스티브 잡스(2015)>의 조안나 호프먼이 구현하는 진짜의 속성은 그들이 남성 주체의 상대역임에도 그들이 영화에서 선점하는 주체성에서 발원한다. 한나는 마이클(레이프 파인즈 분)의 인생 전반에, 조안나는 스티브 잡스(마이클 파스빈더 분)의 인생에 중요한 몇 번의 프레젠테이션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궁극적으로 한나와 조안나는 서사의 비중을 보면 분명한 조연이고, 남성 주체의 각성을 돕는 인물이다. 하지만 윈슬렛이 연기한 한나와 조안나는 소비되는 느낌이 적다. 이는 윈슬렛이 보여주는 생생한 육체성에 기인한다. 윈슬렛의 연기는 관습적이고 한정적으로 사용하는 육체파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한다. <더 리더>에서 마이클 앞에서 브래지어를 턱하고 꺼낸 후 다리는 윈슬렛의 자세나 마이클이 목욕 중인 욕조에 첨벙첨벙 들어가는 윈슬렛의 태도는 한나를 관음하려는 카메라의 의도에 부합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스티브 잡스>에서 윈슬렛은 콸콸 용솟음치는 대사를 폴란드식 영어 억양으로 유려하게 소화해 다수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빼곡한 '대사'의 영화인(각본이 아론 소킨이다) <스티브 잡스>에서 윈슬렛의 조안나가 자기를 증명하는 방식도 의외로 육체연기라는 것이다. 폭압적으로 고집을 관철하는 잡스를 대하는 조안나의 태도는 굳건하다. 윈슬렛이 연기하는 조안나가 잡스의 말을 들을 때 서 있는 자세와 잡스에게 쏘아붙일 때의 몸짓을 보면, 조안나는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인 것만 같다. 절대 주눅 들지 않는 윈슬렛의 태도는 오히려 자신의 설득으로 잡스가 바뀔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육체로 표현한다. 온몸으로 세상의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윈슬렛의 연기는 발로 뛰며 팬데믹 역학 조사를 수행하는 <컨테이전(2011)>의 에린 박사에게도,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지만 사랑을 믿고 싶어 하는 <로맨틱 홀리데이(2006)>의 아이리스에게도, 눈 덮인 유타 산에 조난돼 생존을 도모하는 <우리 사이의 거대한 산(2017)>의 알렉스에게도 살아있다.
윈슬렛의 차기작은 <아바타: 물의 길(2022)>과 2차 세계대전 종군 사진기자 리 밀러의 실화를 다룬 <리>다. 지구의 중력에 끊임없이 저항하던 그는 지금 판도라에서, 1950년대에서 끊임없이 세상과 싸우며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여자들을 기어이 우리가 아는 그 여자로 현현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