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등급 영화
WEBZINE
WEDITOR 최서윤
WEDITOR 최서윤
어느
분야에서나 장르의 존재는 편의성과 동시에 모호성을 수반한다. 단적으로
음악계에 산재하는 무수한 장르들을 떠올려 보라. 뚜렷한
음악적 특징으로 구별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고, 후대로
갈수록 출처 미상의 주먹구구식 라벨링이 난무한다. 록 음악으로만
한정지어도 그 하위 장르로서 블루스 록, 아트 록, 글램 록, 크라우트
록,
포스트
펑크….
하여튼
나열하자면 날밤 새워야 하고,
시부야케이나
AOR처럼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부흥했다는 이유로 온갖 사운드가 하나의 장르로 통칭되기도 한다.
AOR의
경우
Album Oriented Rock 또는
Adult Oriented Rock의 약자로 추정되며, 사실상
그 어원조차도 불분명하다.
이 정보를 근래에서야 접한 지인 S와 나 사이에는 ‘좋아하는 장르로 AOR 꼽는 사람과 겸상 안 한다'는 과격한 근본주의자 같은 농담이 오갔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라벨링이라도 있기에 레코드 숍에서 무작정 음반 뒤적거리다 객사할 수고를 덜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런 가벼운 이점 이상으로 장르라는 것이 단순 음악적 특징으로 규정되지 않고 발생 지역, 아티스트의 콘셉트, 장르적 계보(‘포스트 ~’) 등 여러 범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은 기존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좋은 시도가 되기도 한다. 리스너 입장에서, 혹은 아티스트나 음악 산업의 여타 종사자 입장에서 제각기 이점이 있으리라.
영화계의 실정도 음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로맨스, SF, 코미디 등의 전통적인 장르가 버젓이 존재하긴 하나, ‘스릴러 로맨스'나 ‘가족 코미디' 식의 변용을 통해 장르가 증식되는 현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더불어 영화는 보다 비공식적인 장르 라벨링이 구천을 떠도는데, 영화라는 단어 앞에 수식어만 붙이면 그 자체가 장르로 탈바꿈한다. ‘사랑 영화'라는 광범위한 명칭부터 ‘가족 영화’, ‘공포 영화', ‘전쟁 영화', ‘범죄 영화'… 심지어는 ‘장르 영화'라는 담대한 명칭까지 존재한다(나조차도 장르 영화라는 말을 관성적으로 쓰고 있기에, 이번 기회에 어원을 알아보고자 포털에 검색해보았으나… 레딧(reddit)에서 “What is a genre movie?”라는 주제로 나눈 열띤 토론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외부 링크]
여기서 공포 영화는 호러물의 일종으로 전형적인 소재와 구성 요소들을 생각해볼 수 있기에 그 특성이 명확한 편이다. 그런데 가족 영화는? 전쟁 영화와 범죄 영화가 직관적으로 각각 전쟁과 범죄에 관한 영화인 것과 달리, 가족에 대한 영화 모두를 일컫는 것만은 아니다. (1) 그 내용이 가족에 대한 것인 동시에 (2) 가족과 함께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훈훈’하거나 오락적인 영화여야 한다. 적어도 국내에서 가족 영화라 함은 이 두 조건을 필수적으로 충족해야 하는 기묘한 위치에 서 있다. 추석 특선 영화라는 타이틀 아래 편성되는 가족 영화들의 보편적 특성을 떠올려 보라. 여기서 가족 영화라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나 <걸어도 걸어도>를 틀었다가는 일가친척 분위기가 싸해질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감상한 이들은 알 것이다)
한편으로 여성 영화라는 또다른 범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장르라기에는 다소 방대한 이 분류는 가족 영화처럼 정확히 어떤 기준하에 그 명칭이 부여된 것인지에 대한 혼란을 내포하고 있다.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인지 / 여성 연출자가 만든 영화인지 / 여성 인물이 주요 캐릭터로 활약하는 서사를 지닌 영화인지. 개인적으로 지난 달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방문하기도 했으나, 여성 영화가 대관절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머릿속에 잔존해 있었다. 다만 여성 영화의 경우 레딧까지 갈 것도 없이 나름대로 그 범주를 규정하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가 존재해 왔다. 그 시초격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의 이름을 딴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라는 평가 방식이 있다. 1985년 당시 벡델이 연재하고 있던 <주목해야 할 레즈들(Dykes to Watch Out For)>라는 주간 만화에서 한 여성 캐릭터는 자신이 다음의 조건들을 만족하는 영화만 본다고 말한다. (만화 제목에 은밀히 올라가는 신뢰도)
ㅤㅤ①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해야 하고,
ㅤㅤ② 이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눠야 하며,
ㅤㅤ③ 이때 대화의 주제는 남성에 관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벡델 테스트에 어떤 허점이 존재하는지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성이 여럿 등장해도 통념적인 여성상으로 소비되거나 남성 중심적 시각이 투영된 작품이 수두룩하고, 남성에 관해 떠들더라도 충분히 여성주의적 의식을 담을 수 있으니. 여성 영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나, 영화에서 여성 인물의 등장 자체가 남성 인물 대비 확연히 드물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구축된 여성 캐릭터를 찾기 어렵던 시대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종류의 작품을 판별하려는 목적보다는 영화계의 구조적인 성 차별을 까발리기 위해 도입된 아이디어라고 보는 쪽이 적절해 보인다. 2024년 9월 현재 벡델 테스트를 통해 검증된 여성 영화 리스트를 실은 웹사이트[외부 링크]도 존재하니 궁금한 사람은 열람해 보기를.
후대에 보다 촘촘히 고안된 기준으로 여겨지는 것이 ‘F등급(F-Rated)’이라는 평가 방식이다. 2014년 영국 배스 영화제(Bath Film Festival)의 디렉터 홀리 타퀴니(Holly Tarquini)에 의해 처음 알려진 것으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름이지만… 로우 퀄리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연히도 Female의 약자 F다. F등급을 수여받을 수 있는 조건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벡델 테스트와 달리 셋 모두 필요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임을 참고하자. 즉, 다음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해도 F등급 영화에 속한다.
ㅤㅤ① 여성 감독이 연출한 경우
ㅤㅤ② 여성 작가가 각본을 쓴 경우
ㅤㅤ③ 여성 캐릭터가 주연인 경우
세 조건 모두에 부합하는 영화의 경우 ‘트리플 F등급(Triple F-Rated)’의 영예(?)를 얻는다. F등급은 수용 범위가 넓다 보니 벡델 테스트에 비해 다양한 성격의 여성 영화들을 포괄할 수 있고, 배우와 연출자를 비롯한 스크린 안팎의 여성 제작진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는 게 주요한 차이점이다. 이 또한 공식 웹사이트에 F등급 영화 목록이 정리되어 있으니[외부 링크] 흥미를 붙인 이는 한번 둘러보기를.
관습으로 굳어진 장르의 속성을 밝혀 내려는 노력은 확실히 달갑고도 필요한 행위다. 나 또한 이 노력에 동참하여, 그간 인상깊게 감상한 영화들 중 F등급에 해당하는 작품을 추리고 권해 보고자 한다. (무언가를 기준 삼아 취향을 솎아 내어 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작업이다. 진짜로) 여성 영화계의 클래식 반열에 오른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이나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 등을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서는 사적인 취향을 반영하여 국내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 몇 가지를 선정하고 간략한 평을 덧붙였다. F등급의 조건 중 어느 것을 충족하는지는 앞서 제시한 조건 순서에 따라 제목 옆에 별도로 표기해 놓았다. 개중 여러분의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 하나쯤은 있기를.
1. <수자쿠(1997)>, 가와세 나오미- ①, ②(, ③)
일명 4K(...)로 불리는 일본 영화계의 거장 4인-가와세 나오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기타노 다케시- 중 한 명인 여성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첫 장편. 가족에 관한 단편 다큐멘터리를 찍어 오던 그녀의 첫 극영화이기도 하다. 산업화의 흐름 속 침잠해 가는 산골 마을의 정경과 상실을 견디는 가족의 생을 담백하고도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녹음綠陰을 진득히 담은 롱 쇼트 사이사이 삽입된, 실종된 아버지가 남긴 8미리 필름 푸티지를 자꾸만 상기하게 된다. 당시 28세였던 가와세 나오미에게 ‘역대 칸 영화제 최연소 감독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안긴 작품이나, 가와세의 경우 다른 감독들에 비해 희한할 정도로 국내에서 작품을 구해 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의 가족 이전에 가와세의 가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뒤늦게야 그녀의 작품을 접한 스스로에게 유감을 표할 정도로. (가와세 나오미 감독전 기원!)
2. <대도시(1963)>, 사티야지트 레이 - ③
“여자가 있을 곳은 가정이다”라는 영국 속담을 외는 남편과 보수적인 시아버지 사이에서 여성은 어떻게 살아 남는가… 에 관한 속 터지는 휴먼 드라마의 징조를 띠다가, 종래에는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에 정면 돌파한다. 조금은 낯설 인도 영화계 거장 사티야지트 레이의 대표작 중 하나. 전업 주부 아라티(마드하비 무케르지 분)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방문 판매 일에 뛰어드는데, 와중에 경제 위기로 남편이 돌연 실직하면서 전통적 성 역할이 과감히 반전된다. 가정과 직장 모두에 충실하되 불의에 굴하지 않는 아라티로 분한 마드하비 무케르지는 이후 레이의 다른 몇 작품에도 출연한다.
3.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 존 카사베츠 - ③
한 여성의 고통을 이보다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어 낼 수 있을까? 이 섬세함은 미국 독립영화계 전설 지나 롤랜즈의 열연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메이블(지나 롤랜즈 분)은 그 증세가 악화되며 남편과 파경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앞선 <대도시>와 달리 이 영화는 가정의 붕괴를 순순히 봉합하지 않고, 우리는 그녀의 고통을 관음하기보다 체험하게 된다. 러프한 카메라 워킹 속 롤랜즈의 숨 막히는 메소드 연기에 매료되었다면, 존 카사베츠의 다른 작품들도 꼭 감상해 보기를. 실제 부부이자 영화적 동지였던 카사베츠와 롤랜즈는 이후에도 여러 걸작을 선보이지만, 이 작품을 가히 최고작으로 꼽고 싶다.
+) 흥미롭게도 극중에 지나 롤랜즈의 어머니와 존 카사베츠의 어머니, 심지어는 롤랜즈와 카사베츠의 아들인 닉 카사베츠 또한 출연했다. (닉은 <노트북>의 감독이기도 하다) 이 영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족 영화' 아닐지?
4. <다가오는 것들(2016)>, 미아 한센 러브 - ①, ②, ③
상실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되 그 비애에 잠식되지 않을 강인함.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하는 철학 교사 ‘나탈리’는 기어코 그것을 수행해 낸다. 바람 난 남편의 이혼 통보와 어머니의 죽음에 절망하다가도, 갖은 결별 이후 나탈리는 삶의 온전한 자유를 발견한다. 악취 환기시킨 셈 치고 이미 지나간 것들 대신 다가오는 것들, 이를 테면 생애를 바친 커리어와 다가올 또다른 인연에 집중하는 것. 프랑스의 여성 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이름을 내게 각인시킨 명작이기도 하다. 황정은의 소설 <연년세세>에서 이 영화를 언급했던 구절을 잠시 빌리자면, “미아 한센 러브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대해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
5. <데이지즈(1966)>, 베라 치틸로바 - ①, ②, ③
근래의 영화를 뒤져 봐도 과감함과 당돌함으로 이 영화에 견줄 것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저명한 체코 여성 감독 베라 치틸로바의 작품으로, 치틸로바는 이 영화를 ‘그로테스크한 철학적 다큐멘터리’로 표현한 바 있다. 그녀의 말마따나 사랑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관념을 분해하는 파격적인 이미지, 한시도 눈을 떼기 어려운 현란한 쇼트 전환은 감상 후 한참을 음미해도 품이 모자라다. 마치 카메라에 셀로판지를 덧씌운 듯 색감이 뒤섞이는 연출 또한 인상적인데, 이게 발광發光인가 발광發狂인가 싶지만 시각적 황홀함에 혼 나가긴 매한가지다. 예측 불가한 전개와 기성 체제를 기만하는 호기로운 태도가 장 뤽 고다르 필모그래피 초기의 과격함을 떠오르게 하기도(치틸로바와 고다르 둘 다 60년대 자국 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끌었다).
이 정보를 근래에서야 접한 지인 S와 나 사이에는 ‘좋아하는 장르로 AOR 꼽는 사람과 겸상 안 한다'는 과격한 근본주의자 같은 농담이 오갔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라벨링이라도 있기에 레코드 숍에서 무작정 음반 뒤적거리다 객사할 수고를 덜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런 가벼운 이점 이상으로 장르라는 것이 단순 음악적 특징으로 규정되지 않고 발생 지역, 아티스트의 콘셉트, 장르적 계보(‘포스트 ~’) 등 여러 범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은 기존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좋은 시도가 되기도 한다. 리스너 입장에서, 혹은 아티스트나 음악 산업의 여타 종사자 입장에서 제각기 이점이 있으리라.
영화계의 실정도 음악과 별반 다르지 않다. 로맨스, SF, 코미디 등의 전통적인 장르가 버젓이 존재하긴 하나, ‘스릴러 로맨스'나 ‘가족 코미디' 식의 변용을 통해 장르가 증식되는 현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더불어 영화는 보다 비공식적인 장르 라벨링이 구천을 떠도는데, 영화라는 단어 앞에 수식어만 붙이면 그 자체가 장르로 탈바꿈한다. ‘사랑 영화'라는 광범위한 명칭부터 ‘가족 영화’, ‘공포 영화', ‘전쟁 영화', ‘범죄 영화'… 심지어는 ‘장르 영화'라는 담대한 명칭까지 존재한다(나조차도 장르 영화라는 말을 관성적으로 쓰고 있기에, 이번 기회에 어원을 알아보고자 포털에 검색해보았으나… 레딧(reddit)에서 “What is a genre movie?”라는 주제로 나눈 열띤 토론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외부 링크]
여기서 공포 영화는 호러물의 일종으로 전형적인 소재와 구성 요소들을 생각해볼 수 있기에 그 특성이 명확한 편이다. 그런데 가족 영화는? 전쟁 영화와 범죄 영화가 직관적으로 각각 전쟁과 범죄에 관한 영화인 것과 달리, 가족에 대한 영화 모두를 일컫는 것만은 아니다. (1) 그 내용이 가족에 대한 것인 동시에 (2) 가족과 함께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훈훈’하거나 오락적인 영화여야 한다. 적어도 국내에서 가족 영화라 함은 이 두 조건을 필수적으로 충족해야 하는 기묘한 위치에 서 있다. 추석 특선 영화라는 타이틀 아래 편성되는 가족 영화들의 보편적 특성을 떠올려 보라. 여기서 가족 영화라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나 <걸어도 걸어도>를 틀었다가는 일가친척 분위기가 싸해질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감상한 이들은 알 것이다)
한편으로 여성 영화라는 또다른 범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장르라기에는 다소 방대한 이 분류는 가족 영화처럼 정확히 어떤 기준하에 그 명칭이 부여된 것인지에 대한 혼란을 내포하고 있다.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인지 / 여성 연출자가 만든 영화인지 / 여성 인물이 주요 캐릭터로 활약하는 서사를 지닌 영화인지. 개인적으로 지난 달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방문하기도 했으나, 여성 영화가 대관절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머릿속에 잔존해 있었다. 다만 여성 영화의 경우 레딧까지 갈 것도 없이 나름대로 그 범주를 규정하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가 존재해 왔다. 그 시초격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의 이름을 딴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라는 평가 방식이 있다. 1985년 당시 벡델이 연재하고 있던 <주목해야 할 레즈들(Dykes to Watch Out For)>라는 주간 만화에서 한 여성 캐릭터는 자신이 다음의 조건들을 만족하는 영화만 본다고 말한다. (만화 제목에 은밀히 올라가는 신뢰도)
ㅤㅤ①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해야 하고,
ㅤㅤ② 이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눠야 하며,
ㅤㅤ③ 이때 대화의 주제는 남성에 관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벡델 테스트에 어떤 허점이 존재하는지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성이 여럿 등장해도 통념적인 여성상으로 소비되거나 남성 중심적 시각이 투영된 작품이 수두룩하고, 남성에 관해 떠들더라도 충분히 여성주의적 의식을 담을 수 있으니. 여성 영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척도로서는 불완전하나, 영화에서 여성 인물의 등장 자체가 남성 인물 대비 확연히 드물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구축된 여성 캐릭터를 찾기 어렵던 시대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종류의 작품을 판별하려는 목적보다는 영화계의 구조적인 성 차별을 까발리기 위해 도입된 아이디어라고 보는 쪽이 적절해 보인다. 2024년 9월 현재 벡델 테스트를 통해 검증된 여성 영화 리스트를 실은 웹사이트[외부 링크]도 존재하니 궁금한 사람은 열람해 보기를.
후대에 보다 촘촘히 고안된 기준으로 여겨지는 것이 ‘F등급(F-Rated)’이라는 평가 방식이다. 2014년 영국 배스 영화제(Bath Film Festival)의 디렉터 홀리 타퀴니(Holly Tarquini)에 의해 처음 알려진 것으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름이지만… 로우 퀄리티라는 의미가 아니라 당연히도 Female의 약자 F다. F등급을 수여받을 수 있는 조건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벡델 테스트와 달리 셋 모두 필요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임을 참고하자. 즉, 다음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해도 F등급 영화에 속한다.
ㅤㅤ① 여성 감독이 연출한 경우
ㅤㅤ② 여성 작가가 각본을 쓴 경우
ㅤㅤ③ 여성 캐릭터가 주연인 경우
세 조건 모두에 부합하는 영화의 경우 ‘트리플 F등급(Triple F-Rated)’의 영예(?)를 얻는다. F등급은 수용 범위가 넓다 보니 벡델 테스트에 비해 다양한 성격의 여성 영화들을 포괄할 수 있고, 배우와 연출자를 비롯한 스크린 안팎의 여성 제작진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는 게 주요한 차이점이다. 이 또한 공식 웹사이트에 F등급 영화 목록이 정리되어 있으니[외부 링크] 흥미를 붙인 이는 한번 둘러보기를.
관습으로 굳어진 장르의 속성을 밝혀 내려는 노력은 확실히 달갑고도 필요한 행위다. 나 또한 이 노력에 동참하여, 그간 인상깊게 감상한 영화들 중 F등급에 해당하는 작품을 추리고 권해 보고자 한다. (무언가를 기준 삼아 취향을 솎아 내어 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작업이다. 진짜로) 여성 영화계의 클래식 반열에 오른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이나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 등을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서는 사적인 취향을 반영하여 국내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 몇 가지를 선정하고 간략한 평을 덧붙였다. F등급의 조건 중 어느 것을 충족하는지는 앞서 제시한 조건 순서에 따라 제목 옆에 별도로 표기해 놓았다. 개중 여러분의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 하나쯤은 있기를.
1. <수자쿠(1997)>, 가와세 나오미- ①, ②(, ③)
일명 4K(...)로 불리는 일본 영화계의 거장 4인-가와세 나오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기타노 다케시- 중 한 명인 여성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첫 장편. 가족에 관한 단편 다큐멘터리를 찍어 오던 그녀의 첫 극영화이기도 하다. 산업화의 흐름 속 침잠해 가는 산골 마을의 정경과 상실을 견디는 가족의 생을 담백하고도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녹음綠陰을 진득히 담은 롱 쇼트 사이사이 삽입된, 실종된 아버지가 남긴 8미리 필름 푸티지를 자꾸만 상기하게 된다. 당시 28세였던 가와세 나오미에게 ‘역대 칸 영화제 최연소 감독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안긴 작품이나, 가와세의 경우 다른 감독들에 비해 희한할 정도로 국내에서 작품을 구해 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의 가족 이전에 가와세의 가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뒤늦게야 그녀의 작품을 접한 스스로에게 유감을 표할 정도로. (가와세 나오미 감독전 기원!)
2. <대도시(1963)>, 사티야지트 레이 - ③
“여자가 있을 곳은 가정이다”라는 영국 속담을 외는 남편과 보수적인 시아버지 사이에서 여성은 어떻게 살아 남는가… 에 관한 속 터지는 휴먼 드라마의 징조를 띠다가, 종래에는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에 정면 돌파한다. 조금은 낯설 인도 영화계 거장 사티야지트 레이의 대표작 중 하나. 전업 주부 아라티(마드하비 무케르지 분)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방문 판매 일에 뛰어드는데, 와중에 경제 위기로 남편이 돌연 실직하면서 전통적 성 역할이 과감히 반전된다. 가정과 직장 모두에 충실하되 불의에 굴하지 않는 아라티로 분한 마드하비 무케르지는 이후 레이의 다른 몇 작품에도 출연한다.
3.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 존 카사베츠 - ③
한 여성의 고통을 이보다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어 낼 수 있을까? 이 섬세함은 미국 독립영화계 전설 지나 롤랜즈의 열연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메이블(지나 롤랜즈 분)은 그 증세가 악화되며 남편과 파경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앞선 <대도시>와 달리 이 영화는 가정의 붕괴를 순순히 봉합하지 않고, 우리는 그녀의 고통을 관음하기보다 체험하게 된다. 러프한 카메라 워킹 속 롤랜즈의 숨 막히는 메소드 연기에 매료되었다면, 존 카사베츠의 다른 작품들도 꼭 감상해 보기를. 실제 부부이자 영화적 동지였던 카사베츠와 롤랜즈는 이후에도 여러 걸작을 선보이지만, 이 작품을 가히 최고작으로 꼽고 싶다.
+) 흥미롭게도 극중에 지나 롤랜즈의 어머니와 존 카사베츠의 어머니, 심지어는 롤랜즈와 카사베츠의 아들인 닉 카사베츠 또한 출연했다. (닉은 <노트북>의 감독이기도 하다) 이 영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족 영화' 아닐지?
4. <다가오는 것들(2016)>, 미아 한센 러브 - ①, ②, ③
상실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되 그 비애에 잠식되지 않을 강인함.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하는 철학 교사 ‘나탈리’는 기어코 그것을 수행해 낸다. 바람 난 남편의 이혼 통보와 어머니의 죽음에 절망하다가도, 갖은 결별 이후 나탈리는 삶의 온전한 자유를 발견한다. 악취 환기시킨 셈 치고 이미 지나간 것들 대신 다가오는 것들, 이를 테면 생애를 바친 커리어와 다가올 또다른 인연에 집중하는 것. 프랑스의 여성 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이름을 내게 각인시킨 명작이기도 하다. 황정은의 소설 <연년세세>에서 이 영화를 언급했던 구절을 잠시 빌리자면, “미아 한센 러브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대해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
5. <데이지즈(1966)>, 베라 치틸로바 - ①, ②, ③
근래의 영화를 뒤져 봐도 과감함과 당돌함으로 이 영화에 견줄 것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저명한 체코 여성 감독 베라 치틸로바의 작품으로, 치틸로바는 이 영화를 ‘그로테스크한 철학적 다큐멘터리’로 표현한 바 있다. 그녀의 말마따나 사랑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관념을 분해하는 파격적인 이미지, 한시도 눈을 떼기 어려운 현란한 쇼트 전환은 감상 후 한참을 음미해도 품이 모자라다. 마치 카메라에 셀로판지를 덧씌운 듯 색감이 뒤섞이는 연출 또한 인상적인데, 이게 발광發光인가 발광發狂인가 싶지만 시각적 황홀함에 혼 나가긴 매한가지다. 예측 불가한 전개와 기성 체제를 기만하는 호기로운 태도가 장 뤽 고다르 필모그래피 초기의 과격함을 떠오르게 하기도(치틸로바와 고다르 둘 다 60년대 자국 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