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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민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낚시와 같다. 현 시점 양국에서는 적극적 관광객 유치와 수익성에 중점을 둔 교류라는 대어를 낚는 데에 혈안이다. 대어에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대어를 더 많이 낚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나, 그 이면에 밑을 향해 휘어져 가는 낚싯대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 휘어지는 낚싯대로 비유될 만한 이들은 어떤 존재이며, 어느 곳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 서식해 나가고 있을까? 그 연장선에서, 우리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바라볼 것인지 혹은 미시적으로 바라볼 것인지? 해당 두 가지 관점에 입각하여 18년간 일본에서 살아오며 내게 담긴 시각과 사고를 4년간의 한국 생활에 대입하고 그 산출값에 대해 풀어내 보려 한다.

재일 한국인-조선인,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 등등… 어떤 형태의 단어가 나에게 부합하는지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미취학아동 시절 일본어를 내뱉던 것이 기억의 시작이며, 초등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한인 학교에 다니며 한국 커뮤니티에 스며들게 되었다. 커뮤니티 안에서는 일본 거주 한국인, 한국계 일본인, 재외국민 등으로 갈라지게 되며, 한국 이름을 가졌으나 일본어만 구사할 수 있거나 한국 성에 일본식 이름을 지닌 친구들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고등학교 졸업까지 12년 동안 거쳤는데, 이는 마치 투명한 물에 빨간 물감과 파란 물감이 불규칙적으로 뒤섞이는 느낌이었다. 간결한 형태로 형용되지 않는 현상으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신념은 무엇인가? 신념의 형태로 끌어내는 것이 유의미한 것인가?

해당 담론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도부터였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는 가슴 아프고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억울한 일들이 이 시기부터 지속해서 신주쿠 인근에서 발생해왔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 매체에서 보도한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들의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를 접했을 때 어떻게 받아들였었나? 귀로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확성기를 통해 찢어질 듯한 주파수로 피부로 느낄 때, 팻말 속 표현들을 눈에 담을 때는 현실감을 상실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신오쿠보역에 위치한 故 이수현 분(한국인 유학생으로, 2001년 1월 26일 야마노테선 신오쿠보역 선로에 추락한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사망) 추모비 앞에서 가장 거센 증오적 행위가 일어났을 때 말이다. 이에 관하여 한국 매체에서 보도한 기사의 댓글란에서는 또다른 폭력이 발생하고 있었다. 일본 미디어에서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나 참사들을 과할 정도로 메인 뉴스 토픽으로 삼아 상대국의 이미지 깎아내리기에 급급하였으며(2014년 세월호 참사를 일본 매체가 다루는 방식은 차마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가관이었다) 같은 시간 한국 매체의 댓글란에서는 “일본 지진 기원”, “일본 침몰”이라는 키워드가 남발하고 있었다. 한글과 히라가나·한자 텍스트로 구성된 파괴적 언동, 그리고 증오로 뒤덮인 재특회 군단의 폭령성이 난무할 때, 나는 진심으로 이들 쌍방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타협점이 등장하기를 바랐다. 겨우 10대에 접어들었던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을 크게 느꼈고, 특수한 환경에 놓인 스스로의 개인적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만일 내가 한국에서 쭉 나고 자랐다면 여타 인터넷 인간들처럼 몰상식한 사고를 텍스트로 남발하고 다녔을지, 혹여나 내가 일본인이었다면 우경화에 동조하는 인간이 되었을지.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한일 양국이 서로를 우호적으로 바라본다고들 하지만, 내가 직접 목도했던 재특회 군단 내에는 갓 20대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으며, 성비도 고른 편이었다. 주말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재특회 군단의 확성기 차량들과 혐오 텍스트들이 즐비했고, 일본 경찰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사전에 데모 허가를 먼저 받아내었던 재특회를 보호했으며, 일본 국회에서는 ‘혐오발언금지법’ 제정이 여당의 반대로 발이 묶여있는 상태였다.


이처럼 한일 양국에서 카운터가 오가고 있을 때, 재특회 혐오주의단들의 활동 범위 내에서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하나 둘 도드라지게 된다. “친하게 지내자”는 평화적 슬로건을 내세우며 재특회의 검은 행진을 막아내려는 시민 단체부터 이를 담아내는 해외 저널리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시커멓던 파이 내에 다양한 색깔과 목소리들이 파고들며 그 파동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일본 시민과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민족주의적 혐오주의자들에 대항해 나가기 위해 ‘카운터스’라는 단체를 설립하게 된다. 이 단체는 여러 구성원과 조직들로 느슨하게 묶인 형태로서 각자가 ‘혐오’와 다른 방식으로 맞서 싸워 나갔는데, 그중에는 ‘혐오’라는 언어적 폭력을 물리적 폭력으로 되갚는 전직 야쿠자 출신 중심의 ‘오토코구미’ 또한 존재했으며, 이들은 재특회 단체의 시위에 대항해 온몸으로 맞서 도로를 점거하며 혐오 행진을 막거나 재특회 회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가.
(상세한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 <카운터스(2017)>를 참고.)

필자 본인은 중학교 3학년 시절, 혐오 반대 입장에서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해당 분투장에 직접 위치했을 때, 필자는 21세기 대도시 중의 대도시인 도쿄에서 벌어지는 혐오 발언에 대한 충격을 느끼며 혐오 발언이 난무하는 사회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일본인들의 관점, 거기서 나아가 이러한 분쟁이 여타 국가 및 인종 간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외국인들의 관점에 대해서 등, 보다 다각도적인 의견을 들어볼 수 있었다. 단지 “조센징”이라는 키워드를 꺼내 들며 시비 걸어오는 이들이 싫어서, 그러한 억압으로부터 비롯된 반항심이 나의 시위 참여의 출발점이었으나, 해당 경험을 토대로 나는 재일교포 입장에서의 이데올로기를 보다 다층적인 차원에서 재정립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앞서 언급된 사회적 잔상을 체내에 간직한 상태로 일본에서 건너와 4년 전부터 한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고 있다. 22년간의 인생을 통틀어 보았을 때, 재외국민 혹은 재일교포의 실존적 불안 문제는 주로 한국과 일본 정부 간의 생산성 없는 자극적 카운터에 의해 야기되어 왔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2019년의 수출규제-불매운동 대립과 코로나 상황이라는 긴 터널을 지난 현재, 한일 양국은 국가 관계상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계속해서 굴레에 갇혀 지난 일들을 반복할 것인지. 아니라면 여기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천은 무엇이며,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