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카겔의 M/V(들)에 관해  - 의지와 독립으로서의 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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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이우빈

                                       

‘독립’ 혹은 ‘인디펜던트’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를테면 독립영화란, 인디밴드란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고 자유인가. 자본, 제도, 관습, 주류, 기성 따위를 언급하는 방식은 대개 고루하며 모두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질문과 답변의 순환이다. 어쩌면 이러한 정의의 귀속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미립자의 총체가 ‘독립’이란 미확인의 범주일 수도 있겠다. 하나 최근, 다시금 ‘독립’에의 무용한 정의를 해보고 싶은 자극을 느꼈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할 수 없는 것을 기어코 말해보려는 욕심에의 기질을 살살 긁은 것은 밴드 실리카겔의 신보 <Machine Boy>와 그 뮤직비디오들이다.



<Machine Boy>의 첫 트랙 <Budland> M/V의 첫 장면은 붉은색 선의 헤드셋을 귀에 꽂은 소년의 이미지다. 자연스럽게 태아와 탯줄의 은유로도 보이는 이 대목에서 금세 줄은 끊어지고 이내 정체 모를 새 신체들이 창조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드셋 선의 끊어짐이 음악을 듣는 주체 소년의 방향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것은 필연이든 우연이든 간에 주체가 행한(행해진) 외부와의 의도적 단절이다. 그리고 이어진 신체들의 탄생은 이로부터 거듭난 창조의 연속인 셈이다. 이후 <공각기동대>의 전뇌로 대표되는 사이버펑크의 이미지처럼 온갖 선들로 연결된 인간, 그리고 그로부터 연결된 인물 총체들의 몽타주가 이어진다. 그러더니 <아키라>의 신체 부풀기처럼 연신 외연을 확장해 가고 외피를 늘려 가는 신체들 사이에서 한 천사가 등장한다. 파란 머리의 성인인 천사인데, 그에게 4명의 인간이 검은색의 헤드셋 선을 꽂고 있다. 곧 천사는 그 힘을 잃은 듯 유약한 노란 머리의 아이 천사가 되어 무릎 꿇고 있다. 여기서 4명의 인간이란 응당 실리카겔의 멤버 넷을 뜻하는 것일 터, 다만 천사에게 선을 꽂고 있는 이들의 행태는 일견 연결의 뉘앙스를 띄면서도 무언가 그에게 추출한다는, 그것을 착취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표현적인 앙각과 부감 숏에서 존재감이 작아진 천사의 구도, 또 근엄히 뒷짐 지고 음악을 듣는 4명의 인간, 끝내 LP판의 피격에 목숨을 잃는 천사의 최후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다.

이후 4명의 인간이 거대한 나무를 오른다. 끝을 알 수 없는 높이의 나무 중간 중간엔 운무가 걸쳐 있고 인간들은 암벽 등반하듯 기어코 나무를 오른다. 그런데, 여기 나타난 4명의 인간은 일전의 4인과 행색이 무척 다르다. 일전의 4인이 그 숫자만으로 실리카겔의 표상임을 드러냈다면 이번의 4인은 실제 멤버 개개인의 외모를 따온 듯한 데다가 기타를 메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일전의 4인과 이번 4인은 동일 인물인가. 이것을 명확히 판가름하긴 힘들다. 어쩌면 천사에의 리스닝 착취와 천사의 죽음을 촉매 삼아 일어난 환생의 전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여기서 천사란 실리카겔 혹은 그들의 음악을 창조해 낸 일종의 역사적 영감으로도 기능하게 된다. 다만 명확한 것은 죽음과 창조, 혹은 헤드셋 선의 끊어짐과 이어짐, 그로 인한 리스닝 착취의 연속이 끝내 단순한 실리카겔의 세계수 등반 움직임으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리카겔의 멤버들에겐 헤드셋 선도,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뉘앙스도 존재하지 않는단 점이 중요하다. 그저 그들은 묵묵히 나무를 오른다. 정리하자면 외부로부터의 계속된 자극이 끝난 세계에서 남은 것이라곤, 그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몸으로 감내한 주체(천사=외부의 영감=영감의 역사)가 죽었거나 혹은 실리카겔이 죽인 후에 남은 것이라곤 밴드의 몸을 책임지고 어딘가로 나아가야만 하는 구도자의 삶이란 뜻이다.



어쩌면 이것이 독립이다. 최근 영화계에서 터져 나온 일련의 자기반영적 영화가 그렇듯 독립이란 것은 결국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자아가 어떻게 반응했느냐, 그리고 그 자극에 먹히지 않고 어떻게 표현으로서 반영하느냐의 과정이다. 이것은 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시류다. 동시대 일본 밴드 No Buses가 지난달 발표한 <Eyes>의 M/V는 그들이 줄곧 즐겨 오던 홈비디오의 포맷에서 진행되는데 한 건물의 통유리창에 비치는 멤버들의 모습을 계속 찍어낸 반사 이미지의 지속이 핵심이다. 즉 이들은 지금껏 간단한 영상 조작 기술을 통해 외부의 모습 속 자신들의 신체를 변형하더니 결국 본인들의 모습을 제대로 직시하는 과정에 당도한 것이다. 이러한 ‘반사’의 모티브는 결국 세계가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도구로써 작용하는 동시에 표현의 매개가 된다.

<Machine Boy>의 다음 트랙인 <Mercurial> M/V에서 ‘금속’의 질감이 주요 모티브인 것 역시 반사의 예시와 마찬가지다. 여기서 금속의 모티브는 외부로부터의 방어이며 자신을 지키고 자신으로서 귀속해 낸다. 작은 원둘레의 금속 감옥 속에서 김한주는 갑옷 같은 아우터와 금속의 방패를 신체에 뒤덮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원천 차단한 김한주는 다른 이들이 내는 소음과 움직임에 영 반응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로베르 브레송의 <호수의 란슬롯(1974)>에서 브레송이 란슬롯에게 기사의 의무와 신화를 소거한 채 금속 안의 완벽한 개인으로서 얻는 자유와 그 반대급부에서의 익명성을 부여한 것과 같다. 표현의 거세, 이에 포기하지 않는 외부의 공세-이미지 끝에서 나타난 것은 가면의 존재다. 김한주가 검과 가면을 들고 뛴다. 끝내 그는 가면으로서 완연한 폐쇄의 세계를 맛보려 한다. 다만 아직 가면을 쓰지 못한 그는 <헬레이저>에서 따온 듯한 미지의 의식을 치른 뒤 반쯤 죽은 자가 되어 눈을 감았다가, 뜬다. 다음 트랙 <Realize>의 세계로 진입하겠단 신호다.

김한주는, 실리카겔은 무엇을 자각했는가(realize)? 눈 한 개 달린 외계인의 가면을 쓰고 로우파이한 질감의 비디오 속에서 밴드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런데 Ato란 이름의 외계인 가면을 쓰고 있는 이는 김한주가 아니라 김춘추다. 그러니까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서 탈피하여 익명화의 세계로 걸어간 뒤, 완전한 개인으로서의 음악-표현을 다른 멤버가 계승한 과정이다. 이내 M/V에 틈입하는 애니메이션 푸티지는 더욱이 <호수의 란슬롯>에 근접한다. 갑옷을 쓴 아토의 등 뒤를 아마 <Mercurial>에서 새로이 눈 떴던 김한주가 칼로 찌르는 모습이다. 요컨대 아토의 가면은 실제 아토의 얼굴 가죽이었다. 또다시 죽음과 창조, 착취의 반복. 천사로부터 이어진 ‘영감’의 모티브는 괴물, 인간, 김한주에서 김춘추로 이어져 음악을 만든다. 달리 말해 죽음은 영감으로 감수되고 착취의 창조는 반복되며 밴드는 연주하고 관객은 환호한다. 이것이 실리카겔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가타부타 외부의 ‘무엇’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이 아닌 외부의 모든 자극을 수용하되 그것을 죽여 버리고 자아로 재창조한 후 다시금 외부에 외치는 일이다. 이것을 자각한 실리카겔이 취할 것은 복잡한 이미지도, 상징화된 몽타주도 아닌 당장 지금 살아 움직이는 이들의 공연뿐이다.



한편 이 과정은 실리카겔이라 불리는 내부의 상호작용에서도 일어나는 메커니즘과도 같다. 결국 독립의 대상이 외부이고 주체가 자신이라면 외계, 밴드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려는 멤버들의 원심적 자유의지야말로 진정 인디밴드의 독립을 구성하는 원동력이요 존재의 당위인 것이다. 개체들의 독립을 차치한 채 전체로서의 하나를 외치는 일군의 주류들과 독립 밴드의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 태도의 차이일 테다. 그렇게 ‘독립’에 관한 서두의 질문은 이 태도의 차이에서 다시금 흐물흐물한 답으로 발현된다. 대신 ‘팀워크가 아닌 팀플레이를 지향’한다는 실리카겔의 명제가 더 적확한 답일지 모르겠다. 이는 곧 다분한 현실주의자의 발로가 아닌 세계 속의 인간, 밴드 속의 멤버로서 주체의 방향성을 관철하고 자신들만의 음악을 지켜가겠다는 존재들의 의지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독립으로서의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