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팀 발제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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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엄동욱
WEDITOR 엄동욱
발제 일자 : 25.03.21
발제 영화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1970)>
참석 인원 : DU, SY, HR, 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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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빈더 탄생 80주년. 동시에 2025년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80주년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전쟁이 겨우 막을 내리던 시기였고, 갓 태어난 그에게는 새로운 전쟁터가 열린 셈이었다. 이따금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의 괴팍하고 지랄 맞은 성격이 무엇으로부터 연유된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데, 이를 단순한 유년기 트라우마의 징후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족’이란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전후 동독 난민들과 한 집에 살며 주로 뜨내기, 매춘부와 어울려 지냈던 유년기 파스빈더에게는 가족이란 공동체와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병에 걸려 요양원에 갇혀 있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 몇 년 만에 한 번씩 방문했는데, 그래도 그 자신의 표현을 따르면 그는 ‘홀로 선 꽃’처럼 자라 왔다고 아름답게 이야기했다.
이 꽃은 살아생전 13년의 영화 인생 동안 4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잠을 거를 정도의 영화 제작에 대한 워커홀릭적 강박증은 당연하게도 술과 약을 불렀고… 결국 맹염에 휩싸인 고엽은 얼마 안 가 자신의 잎을 전부 떨구고 말았다.
만약 영화 제작을 ‘건축’에 비유할 수 있다면 파스빈더의 영화는 무척 흥미로운데,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만을(1976)>에는 어릴 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벽돌공이, <성스러운 창녀에 주목하라(1971)>에는 촬영이 도무지 진행되지 않는 영화 제작팀이 등장한다. 그의 영화는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기둥이 무너져 버린, 바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또 한 명의 ‘건축가 R씨’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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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팀은 모두 얼마간의 두통을 호소했다.
12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대부분을 R씨를 둘러싼 대화로 채우는데, R씨의 가족과 동료가 나누는 이야기에는 알맹이가 없다. 그들은 월급이 언제 오르는지, 새 양복을 어디서 맞추는지, 지난 휴가에는 얼마나 스키를 탔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만 늘어놓는다.
사실 초기 누아르 영화에서 파스빈더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정말 필요한 수준의 대사 정도만 인물에게 부여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침묵을 유지했다. 강렬한 소격 효과를 동반한 여백의 침묵은 인물 간의 단절과 소외를 숨김없이 표현했는데, 이 영화는 정반대로 향한다. 인물들은 시종일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대화는 전부 맥거핀처럼 기능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의 내용보다는 대화에 반응하는 R씨의 얼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도그마 95’ 영화들을 연상케 하는 핸드헬드 기법은(심지어 이 영화의 화면비율은 1.37:1이다) 뜬금없는 얼굴 클로즈업으로 R씨의 표정을 잡아내기에 수월했다. HR은 잠시 도그마 95의 영화와 핸드헬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말 없는 R씨 표정에서 발견한 것은 폭발의 미세한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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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 월급이 나온다.
열심히 일하면, 진급한다.
돈이 모이면, 아이를 전학 보낸다.
그리고 가끔, 스키 타러 휴가를 간다.
일이 조금 힘들면, 담배를 끊어야 한다."
R씨의 미쳐 날뜀은 예견된 것이었을까? 그는 아내와 아내의 친구가 나누는 따분한 휴가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TV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입에 문 담배는 의사가 금지한 것이었고, TV에 보이는 것은 우주 배경 복사의 잔류물을 끌어모으는 노이즈 화면이었다. 신경질적인 노이즈와 노랫소리는 R씨를 집요하게 부추긴다. R씨를 옥죄는 "금지"의 조항들(먹으면서 말하지 마라, 나무에 오르지 마라, 업무시간에 개인 전화를 하지 마라), 유순한 톱니바퀴에 기름칠하는 "아니오"의 조항들은 욕망의 자기장 위에서 '지자기 역전'되어 폭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매 순간 미래를 설계했던 건축가는, 정작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자 끔찍한 카덴차를 연주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진작에 그는 신께 바치는 노래에서 이렇게 물었다. "주여,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는 우연히 그의 아들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독수리가 풀려나자, 하늘로 솟아올랐다." 상승적 곡선을 그리는 반란, 이름 지을 수 없는 법에 대한 위반은 욕망의 물음이자 금지에 대한 비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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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은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의문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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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팔러에 따르면 '상호 수동적 행위'는 다른 사람이나 동물 또는 사물이 우리를 대신해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TV 예능에서 쉽게 발견된다. 예능 패널들은 변질된 현대의 고수(鼓手)인데, 화면의 한구석에서 '랜덤한 R씨'를 위해 대신 박수치고 웃는다. 그들은 관찰 중인 화면을 상황 예측의 하이퍼-리얼리티로 변형시킨다. R씨는 그 어떤 경우에도, 엘리트 복서와 같은 패널들보다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없다. R씨는 한 번도 스위스에 가본 적이 없지만 분명 그곳에서의 캠핑은 재밌을 것이다. R씨와 윌로씨는 다음 여름에 어디로 휴가를 가야 할까?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R씨는 "자기의 향유와 아무 관련도 없는 목적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문화-부르주아가 되어버렸다. 도처에 R씨가 아직 살아 있다면... 이라는 끔찍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어야겠다.
발제 영화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1970)>
참석 인원 : DU, SY, HR, MS
서론 : 파스빈더를 기리며

파스빈더 탄생 80주년. 동시에 2025년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80주년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전쟁이 겨우 막을 내리던 시기였고, 갓 태어난 그에게는 새로운 전쟁터가 열린 셈이었다. 이따금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의 괴팍하고 지랄 맞은 성격이 무엇으로부터 연유된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데, 이를 단순한 유년기 트라우마의 징후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족’이란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전후 동독 난민들과 한 집에 살며 주로 뜨내기, 매춘부와 어울려 지냈던 유년기 파스빈더에게는 가족이란 공동체와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병에 걸려 요양원에 갇혀 있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 몇 년 만에 한 번씩 방문했는데, 그래도 그 자신의 표현을 따르면 그는 ‘홀로 선 꽃’처럼 자라 왔다고 아름답게 이야기했다.
이 꽃은 살아생전 13년의 영화 인생 동안 4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잠을 거를 정도의 영화 제작에 대한 워커홀릭적 강박증은 당연하게도 술과 약을 불렀고… 결국 맹염에 휩싸인 고엽은 얼마 안 가 자신의 잎을 전부 떨구고 말았다.
만약 영화 제작을 ‘건축’에 비유할 수 있다면 파스빈더의 영화는 무척 흥미로운데,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만을(1976)>에는 어릴 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벽돌공이, <성스러운 창녀에 주목하라(1971)>에는 촬영이 도무지 진행되지 않는 영화 제작팀이 등장한다. 그의 영화는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기둥이 무너져 버린, 바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또 한 명의 ‘건축가 R씨’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1. 'R씨'라는 시한 폭탄

필름팀은 모두 얼마간의 두통을 호소했다.
MS: 안 그래도 대화가 많은 영화인데 불가피하게 영어 자막으로 감상해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언어적 제약이, 그러니까 일종의 번역-불가능성이 내가 R씨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고,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지독한 대화의 소음에 나까지도 휘말려 드는 것 같았다.
SY: 영화를 보면서 R씨에 내가 동기화된 느낌이었다. 모든 대화가 차갑게 잦아드는 영화의 끝에서야 비로소 모든 게 끝났구나, 라고 느꼈다.
12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대부분을 R씨를 둘러싼 대화로 채우는데, R씨의 가족과 동료가 나누는 이야기에는 알맹이가 없다. 그들은 월급이 언제 오르는지, 새 양복을 어디서 맞추는지, 지난 휴가에는 얼마나 스키를 탔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만 늘어놓는다.
사실 초기 누아르 영화에서 파스빈더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정말 필요한 수준의 대사 정도만 인물에게 부여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침묵을 유지했다. 강렬한 소격 효과를 동반한 여백의 침묵은 인물 간의 단절과 소외를 숨김없이 표현했는데, 이 영화는 정반대로 향한다. 인물들은 시종일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대화는 전부 맥거핀처럼 기능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의 내용보다는 대화에 반응하는 R씨의 얼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도그마 95’ 영화들을 연상케 하는 핸드헬드 기법은(심지어 이 영화의 화면비율은 1.37:1이다) 뜬금없는 얼굴 클로즈업으로 R씨의 표정을 잡아내기에 수월했다. HR은 잠시 도그마 95의 영화와 핸드헬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HR: 이런 기법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설계되지 않은 촬영 기법을 쓰는 건 장소나 배경보다는 '인간'을 보여 주고 싶은 욕망이 큰 것 같다. 인간극장 같기도 하고...(웃음)
SY: 맞다. 이런 기법은 풍경 영화에서 활용되기 어렵다. 그래서 도그마 95 영화들의 소재 고갈이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논외로, R씨가 레코드샵에 들렀을 때의 뜬금없는 얼굴 클로즈업은 정말 웃겼다. 나한테 얼굴을 왜 보여 주는 거지?
우리가 말 없는 R씨 표정에서 발견한 것은 폭발의 미세한 징조였다.
2. 도면은 이차원이지만, 현실은 삼차원이다.

"일하면, 월급이 나온다.
열심히 일하면, 진급한다.
돈이 모이면, 아이를 전학 보낸다.
그리고 가끔, 스키 타러 휴가를 간다.
일이 조금 힘들면, 담배를 끊어야 한다."
R씨의 미쳐 날뜀은 예견된 것이었을까? 그는 아내와 아내의 친구가 나누는 따분한 휴가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TV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입에 문 담배는 의사가 금지한 것이었고, TV에 보이는 것은 우주 배경 복사의 잔류물을 끌어모으는 노이즈 화면이었다. 신경질적인 노이즈와 노랫소리는 R씨를 집요하게 부추긴다. R씨를 옥죄는 "금지"의 조항들(먹으면서 말하지 마라, 나무에 오르지 마라, 업무시간에 개인 전화를 하지 마라), 유순한 톱니바퀴에 기름칠하는 "아니오"의 조항들은 욕망의 자기장 위에서 '지자기 역전'되어 폭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매 순간 미래를 설계했던 건축가는, 정작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자 끔찍한 카덴차를 연주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진작에 그는 신께 바치는 노래에서 이렇게 물었다. "주여,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는 우연히 그의 아들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독수리가 풀려나자, 하늘로 솟아올랐다." 상승적 곡선을 그리는 반란, 이름 지을 수 없는 법에 대한 위반은 욕망의 물음이자 금지에 대한 비웃음이다.
3. 그래서, 대체 R씨는 왜 미쳐 날뛰는가?

HR은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의문을 가졌다.
HR :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그래서 R씨가 도대체 언제 미쳐 날뛰는지' 기대하면서 보았다. 흔히들 예상하는 전개처럼 영화 중반부쯤 터질 것 같았던 광란은 영화의 끝에 가서야 겨우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R씨가 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살에 이르는 결말이 R씨가 미쳐 날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SY : 아리송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차가운 톤을 생각해보았을 때, 뜬금없이 유혈 사태를 보여주고 청각적으로 노이즈를 삽입하는 방식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 같다. 단지 우리가 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은 왜 R씨가 혼자 목매달지 않고 아내와 아들의 목숨마저 앗아가는지이다. 그렇게 했어야만 했나?
MS : 한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성과 정체성은 가족으로부터 도출된다. 그 인간을 지탱하는 게 결국 가족에의 소속감인데 R씨는 전혀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회사나 동료를 비롯한 그 어떤 공동체로부터도. 결국, 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HR : 사실 생각해보면 R씨는 삶을 영위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관객인 나조차도, 저 따분한 대화를 더는 들을 이유가 없었다. 관객은... 점차 R씨가 되어간다.
결론 : R씨는 'R'andom이다

로베르트 팔러에 따르면 '상호 수동적 행위'는 다른 사람이나 동물 또는 사물이 우리를 대신해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TV 예능에서 쉽게 발견된다. 예능 패널들은 변질된 현대의 고수(鼓手)인데, 화면의 한구석에서 '랜덤한 R씨'를 위해 대신 박수치고 웃는다. 그들은 관찰 중인 화면을 상황 예측의 하이퍼-리얼리티로 변형시킨다. R씨는 그 어떤 경우에도, 엘리트 복서와 같은 패널들보다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없다. R씨는 한 번도 스위스에 가본 적이 없지만 분명 그곳에서의 캠핑은 재밌을 것이다. R씨와 윌로씨는 다음 여름에 어디로 휴가를 가야 할까?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R씨는 "자기의 향유와 아무 관련도 없는 목적들을 위해 잉여가치를 흡수하는" 문화-부르주아가 되어버렸다. 도처에 R씨가 아직 살아 있다면... 이라는 끔찍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