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 RE: RE: 영화가 감당할 수 없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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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김민솔


〈뱀파이어 키스〉에서의 니콜라스 케이지 얼굴이 꽤 자극적이다…. 아무튼 케이지를 차치하더라도 동시대에서 영화 속 상징적인 얼굴을 떠올려본다면 그 사람 자체가 갖는 캐릭터성이 드러나는 얼굴(i.e. 임창정? 마동석?)이 우선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캐릭터성이 짙은 얼굴은 인물에게 고정된 관념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홍보나 극초반을 제외하면 어떠한 긍정적인 요소를 주는지는 의문이다. 캐릭터성이 과하면 서사가 캐릭터성에 국한되기 일수고 관객은 반복되는 서사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마동석이 결국 빌런들을 때려눕히겠지… 같은 생각이 든다.

나에게 영화 속 가장 애착 가는 얼굴이 무엇일까 떠올려보니 (뻔할 수도 있지만) 〈잔다르크의 수난(1928)〉에서의 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이었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에서의 제나 로우랜즈의 얼굴도 개인적으로 쟁쟁한 후보였지만, 드레이어가 팔코네티 얼굴을 내러티브의 중심적인 요소로 차용한다는 점에서 두 얼굴의 영향력을 비교할 수 있었다. 무성영화 특성상 인물들의 몸짓과 표정만으로 그 서사를 읽어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잔다르크의 수난〉에서는 특히 팔코네티의 얼굴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단순히 소리가 없기 때문일까? 로저 에버트의 “무성 영화 시대에는 감독들이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통해 본질을 포착한다고 믿었다”라는 말을 보면 그럴듯한 가정이다. 이미지는 말이 없고, 소리는 말이 너무 많다.

드레이어가 팔코네티의 얼굴을 담아내기 위해 가장 중점적으로 요구한 것은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을 지워내는 것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은 자체로서 어떤 표정이나 의미를 드러내지 않으며 외부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확립해 나간다. 카메라와 팔코네티의 얼굴, 혹은 재판관과 팔코네티의 관계로부터. 곧, 무화된 얼굴은 도리어 몽타주의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표정 없는 얼굴은 캐릭터성에 대한 망각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다른 작품에서도 그 배우를 초기화된 관념으로 만날 수 있다. 유운성 평론가는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에서 “망각을 통해 이미지들의 비결정성과 중립성을 되찾은 이들만이 새로운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영화가 이미 교양이 되어버린 이상, 망각의 반복으로 발현되는 종교성이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얘기가 잠깐 샜다. 만약 답글을 보는 당신도 최애의 영화 얼굴을 찾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바로 한글 자막이나 영어 자막 없이 영화를 보는 방법이다. 필자가 이 방법을 쓰게 된 계기는 앞서 언급한 〈영향 아래 있는 여자〉를 시청할 때 영상과 한글 자막의 싱크를 맞추기 귀찮아졌기 때문이었다…. 자막이 없어서 이미지 안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에 집중하고, 나아가 인물의 얼굴을 더욱 본질적으로 보게 된다. 이미지 시퀀스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우리에게 영화의 시각적 논리성을 재조명하게 만드는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RE: RE: 영화가 감당할 수 없는 얼굴

조금 뜬금없지만 자체 답글을 보낸다. VR 관련 그래픽스 AI를 연구하고 있는 터에, 하나 흥미로운 모델을 발견했다. 단일 이미지나 비디오로부터 3D 메시Mesh 형태의 얼굴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 모델이다(SHeaP이라는 모델이다. 사용자를 위한 툴은 존재하지 않지만 AI 코드에 익숙하다면 쉽게 실행해 볼 수 있다.). 기존에도 얼굴을 생성하는 모델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뾰족한 코를 뭉뚱그린다는 등 모델의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움직임을 반영하지 못하는 얼굴 오브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해당 모델은 사람의 얼굴을 정확하게 표현할뿐더러 입의 움직임도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반영해 낸다.

아래는 필자가 얼굴 재구성 AI 모델로 구현한 작업물이다.

* 〈행진하는 청춘(2006)〉 도입부에 등장하는 벤투라의 아내 크로틸데의 독백 장면이다.


* 아래는 모델 연구자들이 제공한 예시로, 윌렘 대포가 노발대발 소리치는 장면이다.


모델에 단일 이미지나 비디오를 넣기만 하면, 얼굴 모양의 움직이는 메시를 만들 수 있다. 흔히 인공지능 모델을 떠올렸을 때 여러 레이어로 쌓아지는 신경망 모델을 떠올리지만, 해당 모델은 신경망의 파라미터들보다 기하적 이방성의Anisotropic 파라미터들이 달라붙어 얼굴을 3차원으로 구성하는 방법이다. 첨부한 데모 얼굴에는 텍스처가 없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오히려 최인훈 작가의 『가면고』 속에서 다문고 왕자가 집착하던 ‘영원의 얼굴(브라마의 얼굴)을 벗겨내어 자기 얼굴에 그 가죽을 쓰는’ 행위의 잔인함이 겹쳐 보였다…. 그러나 현대는 오로지 기술로 현실의 것을 정교히 모방하는 데 바쁘다. 튜링 테스트의 논리대로 구현한 얼굴이 현실과 거의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실제가 될 수 있을까.

언젠가 VR 매체가 영화를 대체할 것이라는 말이 나로서는 상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시점에서의 3D VR 작품들은 대부분 관객에게 한 인물의 시점을 부여하여 그 개인의 경험을 체험하게 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3D AI 모델링이 더 세밀해지고 물리성을 갖춘다면, 가상의 존재를 바라보는 영화적 연출이나 더 나아가 그와 마주 보거나 직접 대화하고 감각하는 연출까지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고정된 거리-스크린과 관객석까지의 거리가 아닌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거리로 가상의 존재를 만나면, 도리어 무성 영화 시기처럼 인물의 얼굴에 집중하게 될지도 모른다. 곧, 100년 전에 가졌다는 ‘얼굴이 인물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순수한 믿음을 재차 가져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기를 착용한 순간 우리가 보는 타자는 현실의 것이 아닌 가상의 무언가로 보일 수밖에 없고, VR이 제공하는 환상성은 사용자가 보는 인물(혹은 인물처럼 생긴 무언가)까지 작용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VR이 형성하는 관객과 타인과의 거리는 영화가 형성하는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질 것이다. 따라서 VR에서 영화 인물과 같은 타자를 소환하고 싶다면, 영혼 없는 타자의 얼굴에 영혼을 불어넣을 방법을 고안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타인(혹은 타인의 얼굴) 위치에서 음성이 흘러나오는 방법만으로는 타자의 영혼을 담아내기에 불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무식한 기술자들은 그저 사람의 얼굴과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가면을 세공하기에 바쁘다. 얼굴에 영혼을 입히는 일은 작가들의 일이라고 떠넘기는 무책임한 기술자가 되기는 싫었지만,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기술자로 남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