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ZINE
WEDITOR 나정훈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음악을 듣게 됐냐고 물었다.
어떤 경로로 음악을 처음 듣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소리를 듣게 된 것 또한 알 길이 없다. “뭐든 처음은 오묘한 면이 있기 마련이지”하고 생각한 후 “이럴 때는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야”하고 생각했다. 그럼 심심해지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 달라 조른다.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두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럼 선충원 「세 남자와 한 여자」의 도입부를 빌려 이렇게 시작하거나,
“이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평범하다. 감동이 없다면 이야기가 너무나도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무릇 아름다운 것은 사실적이지 않은 법이니…”
혹은 존 케이지를 빌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곡 하나를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 듣는다고 〃 〃 〃 〃.”
“〃 〃 연주한다고 〃 〃 〃 〃.”
물론 지금 내가 하는 인용은 글쓰기를 외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글쓰기는 시작부터 큰 산 넘기이다. 그것도 아주 큰 산……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할 말이 없고 할 말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며 이것이 내게 필요한 시다.” 이걸 보니 나도 할 말이 없나 싶다가도, 할 말이 없으면 말을 안 하면 될 것을 구태여 말하고 있으니,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음악은 아름답다.
말해버렸다… 우리가 듣는 음악은 사실적인 소리가 아니어서 감동적이다. 오페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정제된 선율과 화음을 지닌 ‘아리아’보다는 대사처럼 사건을 전개하는 산문으로서의 ‘레치타티보’가 훨씬 더 현실의 소리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는 ‘레치타티보’보다 ‘아리아’에서 눈물을 흘린다. 왜 그럴까? 보르헤스는 가사 있는 탱고와 가사 없는 초기의 탱고를 비교하며 가사의 유무에 따라 탱고의 정서가 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앞에 언급한 글(가사의 예시들)은 모두 문학적인 것의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문학적인 것의 원죄는 그 작품들이 모두 말(단어)로 된 구조이자 상징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검들의 무도회”는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춤과 전투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표상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후자(무도회)가 전자(검들)에 기쁨과 희열을 불어넣는 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그 표현은 우리의 뜨거운 피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도,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시 기쁨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가사의 효과가 탱고에서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하려 한다. 물론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정체성을 탱고에서 찾으려 했고, 유럽 문학의 흐름에서 탱고를 때어내려고 조금 무리를 하고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의 기획을 통해 우리는 가사 있는 음악과 가사 없는 음악을 분리해서 보며, 가사가 가져오는 문학성을 잠시 제쳐두고 음악을 특정 의미에 가두는 것이 아닌, 의미로부터 벗어난 존재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다. “음악은 세계 자체만큼이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존재한다.” 이는 음악이 세계를 반영하거나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뜻이다. 보르헤스가 다시 답한다. “만약 세계가 없거나 언어에 의해 환기될 수 있는 우리의 공유 자산, 즉 기억이 없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음악은 굳이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계가 없어도 음악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음악이 감동적인 이유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동적인 음악만이 참된 음악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보르헤스의 말이 설령 옳다 하더라도, 세계가 없는 음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음악이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음악이 떠나버려도 세계는 괜찮은 것인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이미 나는 음악에 과한 애정을 쏟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음악을 붙잡아 음악을 나의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살려야 한다. 그리고 박참새의 글에서 소생의 가능성을 찾았다.
다음 인용에서 ‘책’과 ‘시’ 대신 ‘음악’을 넣어 읽어보자.
“나는 이 책(음악)을 만들며 늘 애호가의 위치를 자처했다. 글(곡) 쓰는 사람, 시(가사) 쓰는 사람, 조용히 책(음악)을 파는 사람, 책(음악)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 그 무엇도 아닌 애호하는 사람이었다. 시(음악)을 애호하는 사람. 여기서 나의 역할은 언제나 ‘시(음악) 애호가’였고 그래서인지 반쯤은 눈이 멀어 있거나 때때로 바보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사랑과 좋음의 소용돌이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나, 있다면 거짓말쟁이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당당히 유약했기에 모든 시(음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파하면서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계속 나의 옆에 있어 주기를 부탁했다. 다행히 시(음악)은 사람이 아니어서 내가 떠나지 않는 이상 나를 떠날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시(음악)은 사람이 아닐까?”
정말로, 정말로 음악은 사람이 아닐까? 존 케이지는 여섯 개의 벽면이 특수 소재로 만들어져 소리의 반향이 일어나지 않는 무향실에 방문했던 일화를 들려준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교 무향실에 들어간 나는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은 소리, 하나는 낮은 소리였다. 담당 엔지니어에게 설명하자 그는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낮은 소리는 내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알려 주었다. 죽을 때까지 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음악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케이지의 앞선 경험에서 소리의 자동적인 최솟값이 둘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그 최솟값은 내가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아무도 없는 무향실에 소리는 없다. 반대로, 누군가 그 안에 있다면, 무향실에도 소리는 있다. 음악은 세계와 독립적이지만 세계 안에 사람은 곧 음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음악은 사람이다.
이로써 우리는 음악을 우리 안에서 살려냈다. 그것뿐인가? 우리는 오페라에서 레치타티보를, 탱고에서 정열적인 사랑의 가사를, 음악의 가사-시를 구제했다. 물론 가사 없는 음악도 여전히 유효하다. 듣고, 쓰고,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 존 케이지가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한 시라고 했을 때, 그 시는 완전한 침묵이 아니다. 음악은 아름답고, 음악은 사람이다. 음악은 사람이 듣기에, 쓰기에, 연주하기에 아름답다…
음악을 듣다 보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강은 내 앞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강으로, 강의 폭과 유속, 안의 생물체와 버려진 그물망 그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다. 물이 흐르고 음악이 물처럼 흐른다. 그 물을 건너고 싶어진다. 사실 나는 그 물로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난 아가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강이 흐르는 물가의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다. 몸이 붕 떠서 움직인다. 반대에 다다르고 난 뒤론 새로운 세상이다. 하나 웃긴 사실은, 나는 강을 건넜고, 그 순간 나는 강이 마치 사라진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새로 태어난다. 과거의 나는 타인이 되고 지금의 나와 다르게 된다. 또 다른 웃긴 사실은, 언젠가 내가 건너온 강의 반대편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 과거가 어느 종종 나에게 필요할 때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대담집에서 음악과 기억, 과거, 그리고 겪어보지 않은 시간들의 노스탤지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음악은 우리가 전혀 모르던 개인적 과거를 우리에게 드러내 줌으로써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불행한 사건을 안타까워하고,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행동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만든다. “즉, 음악은 우리에게 과거의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이는 나의 인식 범위 바깥에 놓여있던 것-나의 과거, 타인의 과거, 그리고 그 안의 감정들-을 안으로 들이게 함으로써 어떠한 충격을 준다.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곧 놀라움을 느꼈다는 것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는 「보보크」에서 놀라움에 관한 짧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놀람’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무슨 일에나 놀라는 건 당연히 어리석은 짓이며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편이 훨씬 더 훌륭하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까닭에선지 놀라지 않는 것을 뛰어난 태도라며 치켜세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가 않다. 내가 보기에,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건 무슨 일에나 놀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다. 더구나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태도는 어떤 것도 존경하지 않는 태도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어리석은 자는 존경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니 놀란다는 것은 유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존중할 줄 아는 됨됨이의 증거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음악을 듣게 되는, 듣는 이유이다. 음악은 우리에게 감정을 선물하기도 하고, 선물 받은 감정이 내면에서 작용해 타인을 더욱 존중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존 케이지가 “곡 하나를 쓴다고, 듣는다고, 연주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처음 글을 시작할 때, 나는 음악이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갈래의 길을 전부 가야만 했다.
우선, 위 문장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원문은 “Nothing is accomplished by writing a piece of music.”인데, 이 문장에서 ‘Nothing’을 명사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곡 하나를 씀으로써 ‘무(無)-침묵-사일런스’가 이루어진다.” 혹은 원래의 수동태 문장을 능동태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룰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이것이 내가 이룬 것이다. 곡 하나를 씀으로써.”
여기서 존 케이지는 음악이 써지고, 들어지고, 연주되는 과정에 있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써지고, 들어지고, 연주되는 그 행위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으며,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역설적인 생성 관계를 효과적으로 짚는다. 이 역설적인 생성 관계는 음악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기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이상적 목적성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음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침묵(사일런스)을 이룬다고 한다. 여기서 ‘이룬다’는 음악이 곧 침묵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음악은 소리를 내고 사그라들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닌 침묵, 다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사실, 이런 역설적인 생성 관계, 끊임없이 사라졌다 생겨나는 침묵과 소리의 스펙트럼 안에서, 음악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겠다. 음악은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침묵의 형태로. 침묵 속 소리의 탄생에서 아름다움을 듣는 일은 사람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 그리고 존중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서술은 얼핏 보면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수용한다는 완전 개방을 표방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말은 경계 없음, 무책임(혹은 무한책임) 또는 무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강보원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지만 이는 하나의 특정한 태도라고 쓰고 있다.
“‘모든 것을 수용하기’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며, 또 기준을 버리고 이때는 이렇게 저때는 저렇게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에 대한 접근을 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사람은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그는 특정한 것만을 수용하려는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을 수용하기란 굉장히 까다롭게 군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그렇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 학생은 존 케이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다면 ‘실험’ 음악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목적은 없다. 소리다.”
“그럼 뭐가 걱정인가요? 스승님 말씀대로라면 일부러 내든 내지 않든 소리는 언제나 발생하는데.”
“뭐라고? 나는 아직-”
“그러니까- 이런 게 ‘음악’이긴 한 겁니까?”
“아! 너는 결국 모음과 자음으로 이루어진 소리를 좋아하는 게로구나. 무엇이 시급한지도 모르는 아둔한 녀석. 나나 다른 누군가가 네 말에 맞장구쳐 주기를 바라느냐? 왜 나처럼 곡을 쓰고, 연주하고 듣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다가는 완전한 귀머거리처럼 바로 앞에서 나는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음악을 듣고, 쓰고, 연주하는 것은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려는 과정이다. 모든 소리는 침묵을 향해 가고, 침묵에서 나온다. 침묵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타인을 존중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향이다. 우리는 방향, 혹은 태도를 갖추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탄생은 기만이며 아름다움은 기만의 제곱이고 우리는 삶을 인수분해 하며 사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Radiohead의 “No Surprises”
Swans의 “The Sound”
Elliott Smith의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
Have A Nice Life의 “There Is No Food”
Xiu Xiu의 “Ian Curtis Wishlist”
Björk의 “Harm of Will”
John Maus의 “Do Your Best”
Gustav Mahler의 “Symphony No. 5”
윤이상의 “Exemplum In Memoriam Gwangju”
그리고 Johnny Cash의 “Hurt”를 듣고 쓰였다.
어떤 경로로 음악을 처음 듣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소리를 듣게 된 것 또한 알 길이 없다. “뭐든 처음은 오묘한 면이 있기 마련이지”하고 생각한 후 “이럴 때는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야”하고 생각했다. 그럼 심심해지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 달라 조른다.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두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럼 선충원 「세 남자와 한 여자」의 도입부를 빌려 이렇게 시작하거나,
“이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평범하다. 감동이 없다면 이야기가 너무나도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무릇 아름다운 것은 사실적이지 않은 법이니…”
혹은 존 케이지를 빌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곡 하나를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 듣는다고 〃 〃 〃 〃.”
“〃 〃 연주한다고 〃 〃 〃 〃.”
물론 지금 내가 하는 인용은 글쓰기를 외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글쓰기는 시작부터 큰 산 넘기이다. 그것도 아주 큰 산……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할 말이 없고 할 말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며 이것이 내게 필요한 시다.” 이걸 보니 나도 할 말이 없나 싶다가도, 할 말이 없으면 말을 안 하면 될 것을 구태여 말하고 있으니,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음악은 아름답다.
말해버렸다… 우리가 듣는 음악은 사실적인 소리가 아니어서 감동적이다. 오페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정제된 선율과 화음을 지닌 ‘아리아’보다는 대사처럼 사건을 전개하는 산문으로서의 ‘레치타티보’가 훨씬 더 현실의 소리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는 ‘레치타티보’보다 ‘아리아’에서 눈물을 흘린다. 왜 그럴까? 보르헤스는 가사 있는 탱고와 가사 없는 초기의 탱고를 비교하며 가사의 유무에 따라 탱고의 정서가 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앞에 언급한 글(가사의 예시들)은 모두 문학적인 것의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문학적인 것의 원죄는 그 작품들이 모두 말(단어)로 된 구조이자 상징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검들의 무도회”는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춤과 전투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표상을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후자(무도회)가 전자(검들)에 기쁨과 희열을 불어넣는 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그 표현은 우리의 뜨거운 피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도,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시 기쁨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가사의 효과가 탱고에서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하려 한다. 물론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정체성을 탱고에서 찾으려 했고, 유럽 문학의 흐름에서 탱고를 때어내려고 조금 무리를 하고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의 기획을 통해 우리는 가사 있는 음악과 가사 없는 음악을 분리해서 보며, 가사가 가져오는 문학성을 잠시 제쳐두고 음악을 특정 의미에 가두는 것이 아닌, 의미로부터 벗어난 존재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다. “음악은 세계 자체만큼이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존재한다.” 이는 음악이 세계를 반영하거나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뜻이다. 보르헤스가 다시 답한다. “만약 세계가 없거나 언어에 의해 환기될 수 있는 우리의 공유 자산, 즉 기억이 없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음악은 굳이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계가 없어도 음악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음악이 감동적인 이유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동적인 음악만이 참된 음악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보르헤스의 말이 설령 옳다 하더라도, 세계가 없는 음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음악이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음악이 떠나버려도 세계는 괜찮은 것인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이미 나는 음악에 과한 애정을 쏟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음악을 붙잡아 음악을 나의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살려야 한다. 그리고 박참새의 글에서 소생의 가능성을 찾았다.
다음 인용에서 ‘책’과 ‘시’ 대신 ‘음악’을 넣어 읽어보자.
“나는 이 책(음악)을 만들며 늘 애호가의 위치를 자처했다. 글(곡) 쓰는 사람, 시(가사) 쓰는 사람, 조용히 책(음악)을 파는 사람, 책(음악)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 그 무엇도 아닌 애호하는 사람이었다. 시(음악)을 애호하는 사람. 여기서 나의 역할은 언제나 ‘시(음악) 애호가’였고 그래서인지 반쯤은 눈이 멀어 있거나 때때로 바보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사랑과 좋음의 소용돌이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나, 있다면 거짓말쟁이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당당히 유약했기에 모든 시(음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파하면서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계속 나의 옆에 있어 주기를 부탁했다. 다행히 시(음악)은 사람이 아니어서 내가 떠나지 않는 이상 나를 떠날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시(음악)은 사람이 아닐까?”
정말로, 정말로 음악은 사람이 아닐까? 존 케이지는 여섯 개의 벽면이 특수 소재로 만들어져 소리의 반향이 일어나지 않는 무향실에 방문했던 일화를 들려준다.
“몇 년 전 하버드 대학교 무향실에 들어간 나는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은 소리, 하나는 낮은 소리였다. 담당 엔지니어에게 설명하자 그는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낮은 소리는 내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알려 주었다. 죽을 때까지 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음악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케이지의 앞선 경험에서 소리의 자동적인 최솟값이 둘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그 최솟값은 내가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아무도 없는 무향실에 소리는 없다. 반대로, 누군가 그 안에 있다면, 무향실에도 소리는 있다. 음악은 세계와 독립적이지만 세계 안에 사람은 곧 음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음악은 사람이다.
이로써 우리는 음악을 우리 안에서 살려냈다. 그것뿐인가? 우리는 오페라에서 레치타티보를, 탱고에서 정열적인 사랑의 가사를, 음악의 가사-시를 구제했다. 물론 가사 없는 음악도 여전히 유효하다. 듣고, 쓰고,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 존 케이지가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한 시라고 했을 때, 그 시는 완전한 침묵이 아니다. 음악은 아름답고, 음악은 사람이다. 음악은 사람이 듣기에, 쓰기에, 연주하기에 아름답다…
음악을 듣다 보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 강은 내 앞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강으로, 강의 폭과 유속, 안의 생물체와 버려진 그물망 그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난다. 물이 흐르고 음악이 물처럼 흐른다. 그 물을 건너고 싶어진다. 사실 나는 그 물로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난 아가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강이 흐르는 물가의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다. 몸이 붕 떠서 움직인다. 반대에 다다르고 난 뒤론 새로운 세상이다. 하나 웃긴 사실은, 나는 강을 건넜고, 그 순간 나는 강이 마치 사라진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새로 태어난다. 과거의 나는 타인이 되고 지금의 나와 다르게 된다. 또 다른 웃긴 사실은, 언젠가 내가 건너온 강의 반대편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 과거가 어느 종종 나에게 필요할 때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대담집에서 음악과 기억, 과거, 그리고 겪어보지 않은 시간들의 노스탤지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음악은 우리가 전혀 모르던 개인적 과거를 우리에게 드러내 줌으로써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불행한 사건을 안타까워하고,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행동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만든다. “즉, 음악은 우리에게 과거의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이는 나의 인식 범위 바깥에 놓여있던 것-나의 과거, 타인의 과거, 그리고 그 안의 감정들-을 안으로 들이게 함으로써 어떠한 충격을 준다.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곧 놀라움을 느꼈다는 것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는 「보보크」에서 놀라움에 관한 짧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놀람’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무슨 일에나 놀라는 건 당연히 어리석은 짓이며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편이 훨씬 더 훌륭하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까닭에선지 놀라지 않는 것을 뛰어난 태도라며 치켜세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가 않다. 내가 보기에,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건 무슨 일에나 놀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다. 더구나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태도는 어떤 것도 존경하지 않는 태도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어리석은 자는 존경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니 놀란다는 것은 유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존중할 줄 아는 됨됨이의 증거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음악을 듣게 되는, 듣는 이유이다. 음악은 우리에게 감정을 선물하기도 하고, 선물 받은 감정이 내면에서 작용해 타인을 더욱 존중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존 케이지가 “곡 하나를 쓴다고, 듣는다고, 연주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처음 글을 시작할 때, 나는 음악이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갈래의 길을 전부 가야만 했다.
우선, 위 문장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원문은 “Nothing is accomplished by writing a piece of music.”인데, 이 문장에서 ‘Nothing’을 명사로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곡 하나를 씀으로써 ‘무(無)-침묵-사일런스’가 이루어진다.” 혹은 원래의 수동태 문장을 능동태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룰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이것이 내가 이룬 것이다. 곡 하나를 씀으로써.”
여기서 존 케이지는 음악이 써지고, 들어지고, 연주되는 과정에 있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써지고, 들어지고, 연주되는 그 행위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으며,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역설적인 생성 관계를 효과적으로 짚는다. 이 역설적인 생성 관계는 음악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기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이상적 목적성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음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침묵(사일런스)을 이룬다고 한다. 여기서 ‘이룬다’는 음악이 곧 침묵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음악은 소리를 내고 사그라들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닌 침묵, 다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사실, 이런 역설적인 생성 관계, 끊임없이 사라졌다 생겨나는 침묵과 소리의 스펙트럼 안에서, 음악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겠다. 음악은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침묵의 형태로. 침묵 속 소리의 탄생에서 아름다움을 듣는 일은 사람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 그리고 존중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서술은 얼핏 보면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수용한다는 완전 개방을 표방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말은 경계 없음, 무책임(혹은 무한책임) 또는 무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강보원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지만 이는 하나의 특정한 태도라고 쓰고 있다.
“‘모든 것을 수용하기’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며, 또 기준을 버리고 이때는 이렇게 저때는 저렇게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에 대한 접근을 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사람은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그는 특정한 것만을 수용하려는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을 수용하기란 굉장히 까다롭게 군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그렇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 학생은 존 케이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다면 ‘실험’ 음악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목적은 없다. 소리다.”
“그럼 뭐가 걱정인가요? 스승님 말씀대로라면 일부러 내든 내지 않든 소리는 언제나 발생하는데.”
“뭐라고? 나는 아직-”
“그러니까- 이런 게 ‘음악’이긴 한 겁니까?”
“아! 너는 결국 모음과 자음으로 이루어진 소리를 좋아하는 게로구나. 무엇이 시급한지도 모르는 아둔한 녀석. 나나 다른 누군가가 네 말에 맞장구쳐 주기를 바라느냐? 왜 나처럼 곡을 쓰고, 연주하고 듣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다가는 완전한 귀머거리처럼 바로 앞에서 나는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음악을 듣고, 쓰고, 연주하는 것은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려는 과정이다. 모든 소리는 침묵을 향해 가고, 침묵에서 나온다. 침묵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타인을 존중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향이다. 우리는 방향, 혹은 태도를 갖추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탄생은 기만이며 아름다움은 기만의 제곱이고 우리는 삶을 인수분해 하며 사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Radiohead의 “No Surprises”
Swans의 “The Sound”
Elliott Smith의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
Have A Nice Life의 “There Is No Food”
Xiu Xiu의 “Ian Curtis Wishlist”
Björk의 “Harm of Will”
John Maus의 “Do Your Best”
Gustav Mahler의 “Symphony No. 5”
윤이상의 “Exemplum In Memoriam Gwangju”
그리고 Johnny Cash의 “Hurt”를 듣고 쓰였다.
Silence as a Guide to Mu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