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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ITOR 최서윤
WEDITOR 최서윤
결혼 제도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자 매춘과 다름없는 폐단이라며 부정한 칼 마르크스 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선언을 상기해본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결혼한 여성과 매춘부의 차이로 기묘하고도 명료한 지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맺은 노동 계약의 금액과 기간. 노동의 대가로 일정 기간마다 임금을 지불받는 매춘부와 달리, 결혼한 여성은 한번 결혼으로 ‘판매되면’ 영속적인 사적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매매혼처럼 부르주아지가 여성을 신붓감으로 매수하는 “사랑 없는 결혼”이 팽배했던 시대 상황에 놓여 있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만 수 세기가 지난 현시점에도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급진성에, 급기야 특정 종교 계열의 언론들은 마르크스에게 동성애의 사상적 뿌리라는 혐의를 앞다퉈 덧씌웠다. 전통적 가정의 형태를 파괴하고 동성애라는 아노미anomie적 행위를 조장한다는 게 그 상세한 죄목이라면 죄목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위시한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다수 학자들에게 결혼과 가족의 제도적 모순은 제각기의 근거로 공격받아 왔다. 가족 제도에 대한 무수한 비판은‘가족 영화’라는, 영화계에 고착된 장르 분류가 지닌 한계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이 장르 분류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전통적 가족의 개념이 오랜 시간 공격받아 왔음에도, 가족 영화라는 라벨에 새겨진 가족의 개념은 그에 영합하는 내용을 답습하고만 있다. 이쯤에서 가족 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의 공통적 상을 그려 보자. 기본적으로 그 주제가 가족에 대한 것이라는 정의에 더해,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에서 상영되어도 위화감 없을 만큼 내용물이 건전해야 하며, 가족 일체가 감동할 만한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적지 않은 조건들이 따라붙는다.
이 극히 모호한 장르 분류의 반례로 ‘전쟁 영화’나 ‘범죄 영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분류가 전쟁이나 범죄를 주제로 삼기만 하면 되는 것과 달리 가족 영화가 가족에 대한 영화 모두를 일컫는 것이 아님은 명확하다. 앞선 조건을 따르자면 줄곧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온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조차 가족 영화의 축에 낄 수 없다. (그의 대표작 〈어느 가족(2018)〉만 해도 가족 영화가 요구하는 가족의 전형성을 한참 탈피해 있다. 원제인 ‘万引き家族’부터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니.) 가족 영화의 이 미완적인 정의가 대중 일반에 성공적으로 자리잡게 된 배후에는‘정상가족’ 신화가 있다. 이 신화에서 가족의 정상성이라 함은 경제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가부장, 가사 노동에 헌신하는 여성, 그리고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친자식으로 구성된 형태에서 비롯된다. 부모 또는 자식이 부재하거나, 비혼 상태이거나,‘좀도둑 가족’처럼 피도 나누지 않은 데다 단체로 탈선하는 가족이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것이 비단 유교 문화권인 한국 사회에 출현하는 현상이라기에는 해외에서도 이 분류가 너른 정설로 자리잡아 있다. 일례로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에서는 ‘Family’라는 장르 필터로 걸러진 작품들을 모은 Top 50 Family Movies 리스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리스트에는 오로지 앞선 가족 영화의 조건들을 충족하는 영화들만이 즐비한다. 다만 눈여겨볼 것은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 〈해리포터〉 시리즈, 〈마틸다(1996)〉 등 전적으로 아동 연령대를 타겟팅 하는 작품들이라는 점인데, 한국에서의 가족 영화와 달리 거의 Children Movie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는 관점이 주류로 보인다. Family Movie의 범주에서는 아동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한 내용뿐만 아니라 자식이 존재하지 않는 불온한 가족 형태는 버젓이 소거된다.
본고는 장르가 이념적 검열의 수단으로 기능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가족 영화의 관성적 어법 바깥으로 물러나 정상가족 신화에 반하는 영화들 세 편에 몰두해 본다. 언젠가 이런 영화들이 가족영화 특선이라는 타이틀하에 상영되는 풍경이 도래할지 가늠해 보는 일은, 사회주의자들의 염원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정치적 맥락을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정치와 도덕은 전반적인 속박을 통해, 또한 그 결과 전반적인 허위 속에서 사랑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 형성된 제도가 있는 곳은 모두 허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S#1. 家族ゲー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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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은 가족 간 대면과 화합을 강제하는 식사라는 의식이 치루어지는 일종의 제의적 공간이다. 그러나 〈가족 게임(1983)〉 속 식탁은 그 제의성을 상실한 채 집안의 주도권을 탈취하기 위한 모노폴리의 한복판으로 변모한다. 게임의 플레이어인 누마타 일가는 대도시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며 부모와 미성년 형제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의 전형이다. 샐러리맨 아버지 코스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치카코, 모범생 첫째 아들 신이치와 성적도 교우관계도 형편없는 둘째 아들 시게유키. 문제아 시게유키는 형 신이치와 비교당하기 일쑤고 아버지 코스케는 시게유키의 고교 입시에 집착하며 몇 번이고 가정교사를 갈아치운다.
기다란 식탁에 비좁게 붙어 마치 〈최후의 만찬〉을 연상케 하는 누마타 일가의 식사 장면은 우스꽝스러운 한편 공허하다. 찰나의 시선도 교차하기 어려운 살얼음판과 같은 구도에서 정겨운 대화 장면은 좀처럼 포착되지 못한다. 지극히 평범한 이 가정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시게유키를 전담시키기 위해 고용된 가정교사 요시모토(마츠다 유사쿠 분)다. 요시모토는 가히 시게유키의 반항심을 꺾을 만한 위인으로, 식물도감을 소지하고 다니는가하면 과외 중에 성인 잡지를 감상하고, 시게유키를 상냥한 말로 타이르는 한편 불시에 폭력적으로 훈계한다. 요시모토의 독특한 훈육 방식에 힘입어 시게유키의 성적은 상승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이 가정에 평화를 선사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누마타 일가의 권태로운 일상을 빌려 반문한다. 가족 간 화합이라는 이상이 실현 가능하기는 했던가. 자고로 자식이란 부모의 명색을 살리는 제구실만 하면 되는 존재 아니었던가?
잠시 영화사적 측면을 경유하면, 이는 오즈 야스지로로 대표되는 선대 감독들이 착실히 쌓아 온 전통적 가족상에 대한 반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오즈의 영화 속 가족은 근대화 시기 가족 해체의 흐름에서도 어떻게든 가정의 원형을 봉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류 치슈의 연기로 표상되는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지 못한 가장으로서의 회한에 잠기거나, 자식들의 연민의 대상이 되곤 했다. 〈가족 게임〉에서 앞선 가족상이 소멸하다 못해 전복되었음은 자명하다. 쇼와 시대의 가정은 정서적 유대의 공동체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이해관계의 장으로 속화된 것이다. 모리타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가정에 외부적 균열을 내는 제3자의 존재, 즉 가정교사 요시모토라는 인물을 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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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가 동참한 가족 게임은 후반의 게걸스러운 롱테이크 식사 씬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시게유키의 고교 합격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에서 동생 신이치가 자신은 대학에 가지 않겠노라 선언하자 부자 간 논쟁이 벌어지고, 이 논쟁은 느닷없이 동생 시게유키와의 형제 간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이 연쇄적인 ‘입시 논쟁’의 도중에 낀 요시모토는 돌연 와인을 흩뿌리더니 식탁을 들어올려 식기가 죄 쏟아지는 난장판을 만들어 버린다. 기절하듯 잠잠해진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요시모토는 홀연히 사라지는데, 바로 뒤에 등장하는 것은 가족들이 다같이 음식물의 잔해를 치우는 장면이다. 마치 요시모토의 난동은 난동이고 가정에는 어떠한 파장도 부르지 못했다는 듯, 모든 사달을 갈무리하는 식으로 영화는 결론을 맺는다. 이것을 오즈의 영화 속 가족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후대의 노스탤지어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영화 곳곳에 잔재한다.
문득 떠올려 볼 것은 영화의 중반부, 어머니 치카코가 식탁에서 이웃 여자를 대접하는 장면이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그는 의논해 볼 것이 있다면서 시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로 운을 떼며 치카코에게 천진하게 묻는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관을 어떻게 1층까지 옮기죠? 저 엘리베이터로는 관도 안 들어갈 거고.” 그 물음을 들은 순간 치카코의 표정에서 읽히는 것은 이웃 여자에 대한 아연함만이 아닌, 자신과 남편이 미래에 처할 예정된 처지에 대한 스산함이 아닐까.
S#2. Tillsam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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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2000)〉의 주 무대인 ‘Tillsammans(스웨덴어로 ‘함께’라는 뜻)’은 자발적으로 가족과 절연한 이들이 모여 만든 정상성 바깥의 공동체다. 알코올 중독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리사 린드그렌 분)는 이를 벗어나 스톡홀름에 있는 오빠 고란(구스타프 해마스튼 분)의 셰어하우스에 머물게 된다. 엘리자베스와 그의 두 자식, 그리고 고란이 Tillsammans이 각인된 봉고차를 타고 멀어지는 오프닝 시퀀스에는 아바ABBA의 경쾌한 히트곡 〈S.O.S〉가 흐르는데, 이 경쾌함을 이어받듯 영화는 내내 사회 규범을 조소하는 블랙 코미디의 기조로 전개된다. 동성애자부터 생태주의자,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이들은 애당초 사회적 관념이 주입된 적조차 없다는 듯 자신들만의 규범에 근거해 살아 간다.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영역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가족의 형태로 보이는 Tillsammans은 정확히 지칭하자면 코뮌commune(일정한 가치관을 공유하며 공동 생활을 영위하는, 스웨덴에서 보편적인 형태의 공동체)에 속한다. 이 요란스러운 코뮌 내부에는 집단을 유지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수준의 내연 관계가 난무한다. 전 남편 라세와의 이혼 이후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는 안나는 엘리자베스와 사적으로 가까워지고자 둘만의 은밀한 명상 시간을 제안한다. 와중에 한 집에 사는 라세는 게이인 클라스에게 일방적인 구애를 받고, 고란의 여자친구 레나는 다른 남자와의 성행위를 용인하는 열린 관계를 고란에게 강요한다. 결정적으로 기이한 지점은 이 모든 치정극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태연자약하게 ‘동거’를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Tillsammans의 당혹스러운 자유분방함 혹은 방종은 서문에 언급된 철학자 샤를 푸리에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푸리에는 문명화된 사람들의 정신이 근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며, 문명에서 파생된 가족 제도 또한 그 오류의 일환이라고 보았다. 기존의 일부일처제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간단하게도 폴리가미polygamy, 즉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다. “가장 보기 흉한 애벌레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처럼 (¼) 가장 숭고한 사회적 덕성의 결과들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바로 가장 보기 흉한 폴리가미를 통해서이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Tillsammans의 구성원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변태變態를 거친 것인지 자조하듯 묻게 된다.
Tillsammans을 소위 말하는 대안가족이라고 칭하기에는, 그들이 피차 느끼는 유대감은 전통적 가족의 그것과는 분명 달라 보인다. 그들이 가족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묻기 이전에 그들이 꼭 ‘대안적’ 존재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먼저 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영화 말미에 Tillsammans의 일원들이 눈밭에서 행복감에 젖어 뛰노는 장면을 감상하다 보면, 앞선 의문에 대한 답을 유보하고선 그들의 위태로운 동거를 계속 관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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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에게 가족이란, 무력한 삶의 기간을 축내는 명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카엘 하네케의 데뷔작 〈7번째 대륙(1989)〉에서 침몰 직전의 한 가족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삶의 도피처로서 희구한다. 〈가족 게임〉의 누마타 일가와 마찬가지로 전형적 정상가족인 이들은 대기업 사원인 게오르그(디터 베르너 분), 가업인 안경사로 일하는 안나(비르기트 돌 분), 어린 딸 에바(레니 탄저 분)로 이루어져 있다. 게오르그는 이직한 직장에서도 나름대로 순항하며, 안나 또한 직장에서의 일과 딸 에바의 훈육을 살뜰히 병행한다. 매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루틴을 수행하지만 정확히 그 과정에서 그들의 생활은 무력감에 잠식당한다. 이 무력감은 영화 초반 정물들을 반복해서 보여 주는 쇼트 간에서 증폭된다. 쇼핑 카트에 무신경하게 던져지는 냉동음식, 정육점의 날고기, 반복되는 잡담과 계산, 세차, 치장, 주유 등의 무의미하고 일상적인 몸짓들. 실속만 차리는 소음들 속에서 그들의 일상은 더 이상 평화의 나날이 아닌 지겨운 삶을 그럴싸하게 유지하기 위한 허울로 변화한다.
붕괴의 전조는 뜻밖에도 딸 에바에게서 먼저 발견되는데, 에바는 학교 수업시간 중 무슨 이유인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거짓 호소를 하고, 꾀병을 부렸다는 이유로 교사와 어머니 안나에게 야단을 듣는다. 직후에 이어지는 안나의 오빠가 동석한 가족 식사 장면에서 어머니의 죽음으로 우울증을 앓게 된 오빠는 식사 중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시종일관 건조한 어조를 유지하던 영화는 마치 이 광경이 기폭제가 된 양 형체 없는 절망을 프레임 내로 불러들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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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로의 도피를 결심한 게오르그와 안나는 직장을 관두고 잠적한 채 이주를 준비한다. 그들의 이주를 암시하듯 영화 전반에는 불특정한 해변의 이미지가 간헐적으로 삽입되는데, ‘WELCOME TO AUSTRALIA’라는 희망찬 문구와 달리 해변 반대편 산맥으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물리적으로 구현될 수 없는 괴이한 풍경이 담겨 있다. 짐작하겠지만 이는 이주의 최종 목적지가 사실상 죽음이기 때문이다. 게오르그와 안나는 과격하다 못해 황당무계한 방식으로 완벽한 죽음을 위한 채비를 거행한다. 외부와의 단절을 위해 전화선을 끊은 후 집기를 연장으로 파괴하고, 가족 사진과 화폐를 비롯한 재산을 분해하는가 하면, 에바가 종종 구경하던 집안의 어항을 깨 부수기까지 한다.
집단 자살이라는 파국으로 치닫는 전개를 몽상적인 것으로 치부하더라도, 하네케가 이 시나리오를 오스트리아의 한 부르주아 가족이 겪은 실제 사건에 착안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하네케는 영화의 초연 이전 관객들에게 가장 반감을 불러일으킬 부분으로 가족의 죽음이 아닌, 그들이 변기에 화폐 뭉치를 버리는 장면을 예상했다.
"영화를 상영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불평하는 주요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금기 사항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자신과 자녀를 죽이는 것이 훨씬 덜 불편합니다. 돈을 파괴하는 것보다는요.
가족 영화 분류법의 기반인 가족주의가 가족이 곧 삶이며 삶이 곧 가족이라는 믿음에 기대 온 것과 달리, 게오르그와 안나가 지닌 죽음에 대한 갈망은 더 이상 가정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소진의 감각에 연유한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소진을 넘어 탈진 상태에 이른 가족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 속 재생되는 셀린 디온의 공연을 응시한다. 적막 속에 흘러 나오는 〈The Power of Love〉에서 그들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은커녕 맞붙어 있는 가족의 온기조차 느끼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찬미 따위가 아닌 그 정반대에 서 있는 종말을 예감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의 예견된 죽음 이후 영화는 어떠한 사후 설명도 없이 가족이 생전 보고 들었던 풍경을 반복해 보여줄 뿐이고, 깨진 어항의 유리 조각만큼이나 비릿한 종말의 잔상 외에는 도저히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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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위시한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다수 학자들에게 결혼과 가족의 제도적 모순은 제각기의 근거로 공격받아 왔다. 가족 제도에 대한 무수한 비판은‘가족 영화’라는, 영화계에 고착된 장르 분류가 지닌 한계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이 장르 분류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전통적 가족의 개념이 오랜 시간 공격받아 왔음에도, 가족 영화라는 라벨에 새겨진 가족의 개념은 그에 영합하는 내용을 답습하고만 있다. 이쯤에서 가족 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의 공통적 상을 그려 보자. 기본적으로 그 주제가 가족에 대한 것이라는 정의에 더해,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에서 상영되어도 위화감 없을 만큼 내용물이 건전해야 하며, 가족 일체가 감동할 만한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적지 않은 조건들이 따라붙는다.
이 극히 모호한 장르 분류의 반례로 ‘전쟁 영화’나 ‘범죄 영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분류가 전쟁이나 범죄를 주제로 삼기만 하면 되는 것과 달리 가족 영화가 가족에 대한 영화 모두를 일컫는 것이 아님은 명확하다. 앞선 조건을 따르자면 줄곧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온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조차 가족 영화의 축에 낄 수 없다. (그의 대표작 〈어느 가족(2018)〉만 해도 가족 영화가 요구하는 가족의 전형성을 한참 탈피해 있다. 원제인 ‘万引き家族’부터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니.) 가족 영화의 이 미완적인 정의가 대중 일반에 성공적으로 자리잡게 된 배후에는‘정상가족’ 신화가 있다. 이 신화에서 가족의 정상성이라 함은 경제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가부장, 가사 노동에 헌신하는 여성, 그리고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친자식으로 구성된 형태에서 비롯된다. 부모 또는 자식이 부재하거나, 비혼 상태이거나,‘좀도둑 가족’처럼 피도 나누지 않은 데다 단체로 탈선하는 가족이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것이 비단 유교 문화권인 한국 사회에 출현하는 현상이라기에는 해외에서도 이 분류가 너른 정설로 자리잡아 있다. 일례로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에서는 ‘Family’라는 장르 필터로 걸러진 작품들을 모은 Top 50 Family Movies 리스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리스트에는 오로지 앞선 가족 영화의 조건들을 충족하는 영화들만이 즐비한다. 다만 눈여겨볼 것은 〈마인크래프트 무비(2025)〉, 〈해리포터〉 시리즈, 〈마틸다(1996)〉 등 전적으로 아동 연령대를 타겟팅 하는 작품들이라는 점인데, 한국에서의 가족 영화와 달리 거의 Children Movie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는 관점이 주류로 보인다. Family Movie의 범주에서는 아동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한 내용뿐만 아니라 자식이 존재하지 않는 불온한 가족 형태는 버젓이 소거된다.
본고는 장르가 이념적 검열의 수단으로 기능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가족 영화의 관성적 어법 바깥으로 물러나 정상가족 신화에 반하는 영화들 세 편에 몰두해 본다. 언젠가 이런 영화들이 가족영화 특선이라는 타이틀하에 상영되는 풍경이 도래할지 가늠해 보는 일은, 사회주의자들의 염원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정치적 맥락을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정치와 도덕은 전반적인 속박을 통해, 또한 그 결과 전반적인 허위 속에서 사랑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 형성된 제도가 있는 곳은 모두 허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S#1. 家族ゲーム

식탁은 가족 간 대면과 화합을 강제하는 식사라는 의식이 치루어지는 일종의 제의적 공간이다. 그러나 〈가족 게임(1983)〉 속 식탁은 그 제의성을 상실한 채 집안의 주도권을 탈취하기 위한 모노폴리의 한복판으로 변모한다. 게임의 플레이어인 누마타 일가는 대도시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며 부모와 미성년 형제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의 전형이다. 샐러리맨 아버지 코스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치카코, 모범생 첫째 아들 신이치와 성적도 교우관계도 형편없는 둘째 아들 시게유키. 문제아 시게유키는 형 신이치와 비교당하기 일쑤고 아버지 코스케는 시게유키의 고교 입시에 집착하며 몇 번이고 가정교사를 갈아치운다.
기다란 식탁에 비좁게 붙어 마치 〈최후의 만찬〉을 연상케 하는 누마타 일가의 식사 장면은 우스꽝스러운 한편 공허하다. 찰나의 시선도 교차하기 어려운 살얼음판과 같은 구도에서 정겨운 대화 장면은 좀처럼 포착되지 못한다. 지극히 평범한 이 가정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시게유키를 전담시키기 위해 고용된 가정교사 요시모토(마츠다 유사쿠 분)다. 요시모토는 가히 시게유키의 반항심을 꺾을 만한 위인으로, 식물도감을 소지하고 다니는가하면 과외 중에 성인 잡지를 감상하고, 시게유키를 상냥한 말로 타이르는 한편 불시에 폭력적으로 훈계한다. 요시모토의 독특한 훈육 방식에 힘입어 시게유키의 성적은 상승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이 가정에 평화를 선사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누마타 일가의 권태로운 일상을 빌려 반문한다. 가족 간 화합이라는 이상이 실현 가능하기는 했던가. 자고로 자식이란 부모의 명색을 살리는 제구실만 하면 되는 존재 아니었던가?
잠시 영화사적 측면을 경유하면, 이는 오즈 야스지로로 대표되는 선대 감독들이 착실히 쌓아 온 전통적 가족상에 대한 반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오즈의 영화 속 가족은 근대화 시기 가족 해체의 흐름에서도 어떻게든 가정의 원형을 봉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류 치슈의 연기로 표상되는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지 못한 가장으로서의 회한에 잠기거나, 자식들의 연민의 대상이 되곤 했다. 〈가족 게임〉에서 앞선 가족상이 소멸하다 못해 전복되었음은 자명하다. 쇼와 시대의 가정은 정서적 유대의 공동체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이해관계의 장으로 속화된 것이다. 모리타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가정에 외부적 균열을 내는 제3자의 존재, 즉 가정교사 요시모토라는 인물을 동원한다.

요시모토가 동참한 가족 게임은 후반의 게걸스러운 롱테이크 식사 씬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시게유키의 고교 합격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에서 동생 신이치가 자신은 대학에 가지 않겠노라 선언하자 부자 간 논쟁이 벌어지고, 이 논쟁은 느닷없이 동생 시게유키와의 형제 간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이 연쇄적인 ‘입시 논쟁’의 도중에 낀 요시모토는 돌연 와인을 흩뿌리더니 식탁을 들어올려 식기가 죄 쏟아지는 난장판을 만들어 버린다. 기절하듯 잠잠해진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요시모토는 홀연히 사라지는데, 바로 뒤에 등장하는 것은 가족들이 다같이 음식물의 잔해를 치우는 장면이다. 마치 요시모토의 난동은 난동이고 가정에는 어떠한 파장도 부르지 못했다는 듯, 모든 사달을 갈무리하는 식으로 영화는 결론을 맺는다. 이것을 오즈의 영화 속 가족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후대의 노스탤지어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영화 곳곳에 잔재한다.
문득 떠올려 볼 것은 영화의 중반부, 어머니 치카코가 식탁에서 이웃 여자를 대접하는 장면이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그는 의논해 볼 것이 있다면서 시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로 운을 떼며 치카코에게 천진하게 묻는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관을 어떻게 1층까지 옮기죠? 저 엘리베이터로는 관도 안 들어갈 거고.” 그 물음을 들은 순간 치카코의 표정에서 읽히는 것은 이웃 여자에 대한 아연함만이 아닌, 자신과 남편이 미래에 처할 예정된 처지에 대한 스산함이 아닐까.
S#2. Tillsammans

〈동거(2000)〉의 주 무대인 ‘Tillsammans(스웨덴어로 ‘함께’라는 뜻)’은 자발적으로 가족과 절연한 이들이 모여 만든 정상성 바깥의 공동체다. 알코올 중독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리사 린드그렌 분)는 이를 벗어나 스톡홀름에 있는 오빠 고란(구스타프 해마스튼 분)의 셰어하우스에 머물게 된다. 엘리자베스와 그의 두 자식, 그리고 고란이 Tillsammans이 각인된 봉고차를 타고 멀어지는 오프닝 시퀀스에는 아바ABBA의 경쾌한 히트곡 〈S.O.S〉가 흐르는데, 이 경쾌함을 이어받듯 영화는 내내 사회 규범을 조소하는 블랙 코미디의 기조로 전개된다. 동성애자부터 생태주의자, 공산주의자, 페미니스트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이들은 애당초 사회적 관념이 주입된 적조차 없다는 듯 자신들만의 규범에 근거해 살아 간다.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영역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가족의 형태로 보이는 Tillsammans은 정확히 지칭하자면 코뮌commune(일정한 가치관을 공유하며 공동 생활을 영위하는, 스웨덴에서 보편적인 형태의 공동체)에 속한다. 이 요란스러운 코뮌 내부에는 집단을 유지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수준의 내연 관계가 난무한다. 전 남편 라세와의 이혼 이후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는 안나는 엘리자베스와 사적으로 가까워지고자 둘만의 은밀한 명상 시간을 제안한다. 와중에 한 집에 사는 라세는 게이인 클라스에게 일방적인 구애를 받고, 고란의 여자친구 레나는 다른 남자와의 성행위를 용인하는 열린 관계를 고란에게 강요한다. 결정적으로 기이한 지점은 이 모든 치정극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태연자약하게 ‘동거’를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Tillsammans의 당혹스러운 자유분방함 혹은 방종은 서문에 언급된 철학자 샤를 푸리에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푸리에는 문명화된 사람들의 정신이 근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며, 문명에서 파생된 가족 제도 또한 그 오류의 일환이라고 보았다. 기존의 일부일처제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간단하게도 폴리가미polygamy, 즉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다. “가장 보기 흉한 애벌레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처럼 (¼) 가장 숭고한 사회적 덕성의 결과들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바로 가장 보기 흉한 폴리가미를 통해서이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Tillsammans의 구성원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변태變態를 거친 것인지 자조하듯 묻게 된다.
Tillsammans을 소위 말하는 대안가족이라고 칭하기에는, 그들이 피차 느끼는 유대감은 전통적 가족의 그것과는 분명 달라 보인다. 그들이 가족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묻기 이전에 그들이 꼭 ‘대안적’ 존재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먼저 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영화 말미에 Tillsammans의 일원들이 눈밭에서 행복감에 젖어 뛰노는 장면을 감상하다 보면, 앞선 의문에 대한 답을 유보하고선 그들의 위태로운 동거를 계속 관음하고 싶어진다.

S#3. Der Siebente Kontinent

혹자에게 가족이란, 무력한 삶의 기간을 축내는 명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카엘 하네케의 데뷔작 〈7번째 대륙(1989)〉에서 침몰 직전의 한 가족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삶의 도피처로서 희구한다. 〈가족 게임〉의 누마타 일가와 마찬가지로 전형적 정상가족인 이들은 대기업 사원인 게오르그(디터 베르너 분), 가업인 안경사로 일하는 안나(비르기트 돌 분), 어린 딸 에바(레니 탄저 분)로 이루어져 있다. 게오르그는 이직한 직장에서도 나름대로 순항하며, 안나 또한 직장에서의 일과 딸 에바의 훈육을 살뜰히 병행한다. 매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루틴을 수행하지만 정확히 그 과정에서 그들의 생활은 무력감에 잠식당한다. 이 무력감은 영화 초반 정물들을 반복해서 보여 주는 쇼트 간에서 증폭된다. 쇼핑 카트에 무신경하게 던져지는 냉동음식, 정육점의 날고기, 반복되는 잡담과 계산, 세차, 치장, 주유 등의 무의미하고 일상적인 몸짓들. 실속만 차리는 소음들 속에서 그들의 일상은 더 이상 평화의 나날이 아닌 지겨운 삶을 그럴싸하게 유지하기 위한 허울로 변화한다.
붕괴의 전조는 뜻밖에도 딸 에바에게서 먼저 발견되는데, 에바는 학교 수업시간 중 무슨 이유인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거짓 호소를 하고, 꾀병을 부렸다는 이유로 교사와 어머니 안나에게 야단을 듣는다. 직후에 이어지는 안나의 오빠가 동석한 가족 식사 장면에서 어머니의 죽음으로 우울증을 앓게 된 오빠는 식사 중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시종일관 건조한 어조를 유지하던 영화는 마치 이 광경이 기폭제가 된 양 형체 없는 절망을 프레임 내로 불러들이기 시작한다.

오스트레일리아로의 도피를 결심한 게오르그와 안나는 직장을 관두고 잠적한 채 이주를 준비한다. 그들의 이주를 암시하듯 영화 전반에는 불특정한 해변의 이미지가 간헐적으로 삽입되는데, ‘WELCOME TO AUSTRALIA’라는 희망찬 문구와 달리 해변 반대편 산맥으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물리적으로 구현될 수 없는 괴이한 풍경이 담겨 있다. 짐작하겠지만 이는 이주의 최종 목적지가 사실상 죽음이기 때문이다. 게오르그와 안나는 과격하다 못해 황당무계한 방식으로 완벽한 죽음을 위한 채비를 거행한다. 외부와의 단절을 위해 전화선을 끊은 후 집기를 연장으로 파괴하고, 가족 사진과 화폐를 비롯한 재산을 분해하는가 하면, 에바가 종종 구경하던 집안의 어항을 깨 부수기까지 한다.
집단 자살이라는 파국으로 치닫는 전개를 몽상적인 것으로 치부하더라도, 하네케가 이 시나리오를 오스트리아의 한 부르주아 가족이 겪은 실제 사건에 착안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하네케는 영화의 초연 이전 관객들에게 가장 반감을 불러일으킬 부분으로 가족의 죽음이 아닌, 그들이 변기에 화폐 뭉치를 버리는 장면을 예상했다.
"영화를 상영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불평하는 주요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금기 사항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자신과 자녀를 죽이는 것이 훨씬 덜 불편합니다. 돈을 파괴하는 것보다는요.
가족 영화 분류법의 기반인 가족주의가 가족이 곧 삶이며 삶이 곧 가족이라는 믿음에 기대 온 것과 달리, 게오르그와 안나가 지닌 죽음에 대한 갈망은 더 이상 가정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소진의 감각에 연유한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소진을 넘어 탈진 상태에 이른 가족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 속 재생되는 셀린 디온의 공연을 응시한다. 적막 속에 흘러 나오는 〈The Power of Love〉에서 그들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은커녕 맞붙어 있는 가족의 온기조차 느끼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에 대한 찬미 따위가 아닌 그 정반대에 서 있는 종말을 예감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의 예견된 죽음 이후 영화는 어떠한 사후 설명도 없이 가족이 생전 보고 들었던 풍경을 반복해 보여줄 뿐이고, 깨진 어항의 유리 조각만큼이나 비릿한 종말의 잔상 외에는 도저히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