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 유니버스 YOHJI UNIVERSE
WEBZINE
WEDITOR 도기유
릭 오웬스Rick Owens, 월터 반 베이렌동크Walter Van Beirendonck, 레이 가와쿠보川久保玲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위대한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비전의 총체적 결과물로서의 작업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우주, 즉 세계관을 구축해왔다. 그런데 요지 야마모토山本耀司에게선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관이란 게. 요지 야마모토를 폄하하거나, 디자인에 있어 세계관이 꼭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은 아니다. 세계관 없이도 훌륭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은 많으며, 어떻게 보면 광의의 세계관 구축을 추구하는 소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들은 내가 기억하고 느낀 바로는 대체로 구렸다. 그냥 없을 뿐인 거다, 세계관이란 게.
혹자는 요지 야마모토의 블랙 컬러와 특유의 실루엣과 분위기를 언급하며 반박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캐릭터일 뿐이다. 세계관과 캐릭터는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세계관은 우리에게 일상에서 마주칠 수 없는 ‘가능성’ - 새로운 심상을 자극하고, 찾고, 발명하도록 하는 - 으로서의 도피처, 또는 비전의 장을 제공한다. 이에 반해 캐릭터는 미감적, 조형적, 주제적 영역에 국한해 작용할 뿐이지, 세계를 창조하는 기능을 수행하진 못한다. 릭 오웬스, 월터 반 베이런동크, 레이 가와쿠보와 같은 디자이너들에겐 세계관이 있다. 릭 오웬스는 미셸 라미Michèle Lamy와 함께 그들의 열성적인 팬덤들이 거주하는 고딕 왕국을 건설했다. 월터 반 베이런동크는 LGBT-BDSM-공상과학-샤머니즘 초융합장르라는 그의 독자적 영역 속에서 W.&L.T, 딥 키스를 나누는 털북숭이 곰돌이들, 라텍스와 개구개를 통해 그만의 장르 속에서 그만의 내러티브를 구축해가고 있다. 레이 가와쿠보는 - 글을 쓰는 사람이 나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녀 스스로 말했지만 - ‘히로시마 시크’로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맥락을 창조해냈고, 그 속에서 그녀는 안티-패션을 상징하는 ‘느와Noir 꼼데가르송Comme des Garçons’ 대제국을 이뤄냈다.
하지만 요지 야마모토는 세계를 창조한다기보단,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를 그만의 방식으로 비틀어 재창조, 또는 가공하는 데에 가깝다. 삶과 세상은 복잡다변하기에, 하나의 세계가 옷에 반영될 때 그 과정와 결과는 대개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며, 반투명하다. 하지만 그의 옷은 너무나 명확하며 뚜렷하다.
그의 옷은 미감적으로 훌륭하고, 매우 조형적이며, 하나의 아름다운 건축물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허나, 그는 뛰어난 의상 설계가(architect)일진 몰라도, 세계의 설계자는 아니다. 흑백의 컬러 팔레트로 점철된 그의 블랙 시크 스타일은 - 물론 상당한 결의 차이는 있지만 - 레이 가와쿠보를 연상하게 하나, 레이 가와쿠보는 그녀의 세계관 속에서 다양한 변주를 거듭하며 새로운 요소들을 세계관에 지속적으로 편입시켜왔다. 반면, 근 십 년 동안의 요지 야마모토는 자신의 세이프티 존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가복제와 소소한 자가변주를 반복해왔다. 물론, 요지 야마모토인만큼 옷은 항상 멋있었다. 요지 야마모토는 특정 요소, 아이디어, 소재에 대해 철저하게 탐색하고, 정해놓은 경로에 따라 정해놓은 주제를 의상에 재현시키는 데엔 관심이 많고, 뛰어난 디자이너임을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슬 심심하다 느껴질 때도 됐다. 블랙 로브, 화이트 셔츠, 루즈한 실루엣, 가끔씩 실밥 꼬아주기, 모자 모자 모자... 그의 정체성, 그의 캐릭터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계관이 있는 디자이너는 그 세계관이라는 담보할 수 있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더욱 넓다. 그런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시도와, 서로 다른 라인과, 협업 작업 속에서도 그, 또는 그녀의 세계관과 색채가 결국엔 드러난다. 그러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요지와 함께 일본 아방가르드의 거장으로 묶이는 레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레이와 달리, 상술 했듯이, 요지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요지스럽다. 레이 가와쿠보의 근 10년 컬렉션을 (정확한 연도까진 못 맞출지도 모르겠으나) 연도별로 구분할 순 있어도, 요지 야마모토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2008년의 요지도 2018년의 요지 같고, 2020년의 요지도 2010년의 요지 같다. 주제의식과 캐릭터는 뛰어나나, 전체성을 유지하는 변주도 없이, 그 캐릭터가 너무나 뛰어나고 너무나 뚜렷하다.
이러한 세계관의 부재에 근거한 요지의 한계는 협업 컬렉션에서 눈에 띄게 드러난다. 아무리 자신의 색이 강한 디자이너라 해도, 협업을 진행할 땐 상대의 니즈와 색에 부응하는 변주는 불가피하다. 자신의 세계관이 있는 디자이너는 변주 속에서도 자신의 색과 일관성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요지의 협업 컬렉션들은 일관성이 없고, 요지의 색이 너무나도 흐릿하게 드러난다. 최근의 뉴 에라New Era와의 협업 컬렉션은 솔직히 요지 야마모토 로고만 지우면 요지 야마모토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전무하다. 슈프림Supreme과 협업했을 때도 솔직히 저게 뭐가 요지 야마모토인가 싶었다. 요즘 요지 야마모토 사단의 루키로 떠오르고 있는 키에 아인젤갱어Kie Einzelgänger와의 협업도 소신발언 하자면... 잘 모르겠다. 플레인한 레더 자켓 배면에 디자이너 얼굴 왕왕하게 박아놓고 파는 게 ‘요지스러운’ 걸까(2018 S/S에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긴 하다). 각설하고, 결론은 요지는 협업할 때마다 “이게 ‘요지’다”라는 느낌이 잘 드러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요지가 보여준 근래의 한계와는 별개로, 세계관이 있고 없고가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냐의 여부를 가르진 않는다. 사실 세계관이라는 걸 만드는 가장 큰 목적도 돈 때문일지도 모른다(우린 존나 예전에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거지). 창조적 충동의 발흥은 언제는 마케팅용 미끼로 변할 수 있고, 새로운 창조적 세계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창조적 공산품들을 제공하는 가판대로 끝날 수 있으니까. 그 레이 가와쿠보도 그녀의 세계관을 향수와 하트뿅뿅 티셔츠 판매를 통한 재정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활용하고 있지 않나. 어쩌면 세계관 자체가 패션 마케팅의 가장 크고 음험한 성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이 세계관이란 게 분명 디자이너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긴 하나, 이게 궁극적으로 패션 신의 생산자, 소비자 모두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런 건 애초에 잘 없다. 조금은 허무한 결론일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아직도 요지 야마모토의 아우터 한 벌을 갈구한다.
혹자는 요지 야마모토의 블랙 컬러와 특유의 실루엣과 분위기를 언급하며 반박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캐릭터일 뿐이다. 세계관과 캐릭터는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세계관은 우리에게 일상에서 마주칠 수 없는 ‘가능성’ - 새로운 심상을 자극하고, 찾고, 발명하도록 하는 - 으로서의 도피처, 또는 비전의 장을 제공한다. 이에 반해 캐릭터는 미감적, 조형적, 주제적 영역에 국한해 작용할 뿐이지, 세계를 창조하는 기능을 수행하진 못한다. 릭 오웬스, 월터 반 베이런동크, 레이 가와쿠보와 같은 디자이너들에겐 세계관이 있다. 릭 오웬스는 미셸 라미Michèle Lamy와 함께 그들의 열성적인 팬덤들이 거주하는 고딕 왕국을 건설했다. 월터 반 베이런동크는 LGBT-BDSM-공상과학-샤머니즘 초융합장르라는 그의 독자적 영역 속에서 W.&L.T, 딥 키스를 나누는 털북숭이 곰돌이들, 라텍스와 개구개를 통해 그만의 장르 속에서 그만의 내러티브를 구축해가고 있다. 레이 가와쿠보는 - 글을 쓰는 사람이 나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녀 스스로 말했지만 - ‘히로시마 시크’로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맥락을 창조해냈고, 그 속에서 그녀는 안티-패션을 상징하는 ‘느와Noir 꼼데가르송Comme des Garçons’ 대제국을 이뤄냈다.
하지만 요지 야마모토는 세계를 창조한다기보단,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를 그만의 방식으로 비틀어 재창조, 또는 가공하는 데에 가깝다. 삶과 세상은 복잡다변하기에, 하나의 세계가 옷에 반영될 때 그 과정와 결과는 대개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며, 반투명하다. 하지만 그의 옷은 너무나 명확하며 뚜렷하다.
그의 옷은 미감적으로 훌륭하고, 매우 조형적이며, 하나의 아름다운 건축물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허나, 그는 뛰어난 의상 설계가(architect)일진 몰라도, 세계의 설계자는 아니다. 흑백의 컬러 팔레트로 점철된 그의 블랙 시크 스타일은 - 물론 상당한 결의 차이는 있지만 - 레이 가와쿠보를 연상하게 하나, 레이 가와쿠보는 그녀의 세계관 속에서 다양한 변주를 거듭하며 새로운 요소들을 세계관에 지속적으로 편입시켜왔다. 반면, 근 십 년 동안의 요지 야마모토는 자신의 세이프티 존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가복제와 소소한 자가변주를 반복해왔다. 물론, 요지 야마모토인만큼 옷은 항상 멋있었다. 요지 야마모토는 특정 요소, 아이디어, 소재에 대해 철저하게 탐색하고, 정해놓은 경로에 따라 정해놓은 주제를 의상에 재현시키는 데엔 관심이 많고, 뛰어난 디자이너임을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슬 심심하다 느껴질 때도 됐다. 블랙 로브, 화이트 셔츠, 루즈한 실루엣, 가끔씩 실밥 꼬아주기, 모자 모자 모자... 그의 정체성, 그의 캐릭터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계관이 있는 디자이너는 그 세계관이라는 담보할 수 있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더욱 넓다. 그런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시도와, 서로 다른 라인과, 협업 작업 속에서도 그, 또는 그녀의 세계관과 색채가 결국엔 드러난다. 그러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요지와 함께 일본 아방가르드의 거장으로 묶이는 레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레이와 달리, 상술 했듯이, 요지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요지스럽다. 레이 가와쿠보의 근 10년 컬렉션을 (정확한 연도까진 못 맞출지도 모르겠으나) 연도별로 구분할 순 있어도, 요지 야마모토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2008년의 요지도 2018년의 요지 같고, 2020년의 요지도 2010년의 요지 같다. 주제의식과 캐릭터는 뛰어나나, 전체성을 유지하는 변주도 없이, 그 캐릭터가 너무나 뛰어나고 너무나 뚜렷하다.
이러한 세계관의 부재에 근거한 요지의 한계는 협업 컬렉션에서 눈에 띄게 드러난다. 아무리 자신의 색이 강한 디자이너라 해도, 협업을 진행할 땐 상대의 니즈와 색에 부응하는 변주는 불가피하다. 자신의 세계관이 있는 디자이너는 변주 속에서도 자신의 색과 일관성을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요지의 협업 컬렉션들은 일관성이 없고, 요지의 색이 너무나도 흐릿하게 드러난다. 최근의 뉴 에라New Era와의 협업 컬렉션은 솔직히 요지 야마모토 로고만 지우면 요지 야마모토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전무하다. 슈프림Supreme과 협업했을 때도 솔직히 저게 뭐가 요지 야마모토인가 싶었다. 요즘 요지 야마모토 사단의 루키로 떠오르고 있는 키에 아인젤갱어Kie Einzelgänger와의 협업도 소신발언 하자면... 잘 모르겠다. 플레인한 레더 자켓 배면에 디자이너 얼굴 왕왕하게 박아놓고 파는 게 ‘요지스러운’ 걸까(2018 S/S에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긴 하다). 각설하고, 결론은 요지는 협업할 때마다 “이게 ‘요지’다”라는 느낌이 잘 드러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요지가 보여준 근래의 한계와는 별개로, 세계관이 있고 없고가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냐의 여부를 가르진 않는다. 사실 세계관이라는 걸 만드는 가장 큰 목적도 돈 때문일지도 모른다(우린 존나 예전에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거지). 창조적 충동의 발흥은 언제는 마케팅용 미끼로 변할 수 있고, 새로운 창조적 세계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창조적 공산품들을 제공하는 가판대로 끝날 수 있으니까. 그 레이 가와쿠보도 그녀의 세계관을 향수와 하트뿅뿅 티셔츠 판매를 통한 재정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활용하고 있지 않나. 어쩌면 세계관 자체가 패션 마케팅의 가장 크고 음험한 성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이 세계관이란 게 분명 디자이너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긴 하나, 이게 궁극적으로 패션 신의 생산자, 소비자 모두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런 건 애초에 잘 없다. 조금은 허무한 결론일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아직도 요지 야마모토의 아우터 한 벌을 갈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