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1의 기억에게...

WEBZINE
WEDITOR   엄다현

                                       

x-1의 기억에게...
     필자의 수첩 속에 오래 머물던 메모로부터 시작하는 이 글은 사랑과 상실을 겪는 인간의 미성숙함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관통한다. 개념과 사랑에 관한 구체적인 성찰을 담은 메모는 타자 혹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거나 독백을 읊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전문성이 짙은 어휘나 어투가 아닌 다소 주관적인 추상 표현을 경유하기에 유희적 감상을 유도한다. 또한, 일부 정보를 감춘 주관적 경험을 소환하는 감각에 편승하여 있기에 단번에 동화되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서도 다소 격양된 뉘앙스로 거북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자기고백적 성찰이 끝나면, 두 가지 음악과 영화 한 편을 통해 침묵이 말 대신 가져다 주는 나(I)의 출현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이로써 필자의 내면세계의 네트워크를 작게 자른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니, 긴장할 필요 없이 읽길 바란다. 사적인 영역을 내비치는 것은 내게 작은 떨림을 주지만, 읽는 당신에게 작은 감흥으로 가 닿는다면 긴장 상태는 곧 유의미해질 것이다. 그럼 난 또 다시 전송할 불규칙한 진실을 적어 내려갈 것을 안다.


사랑과 상실에 관한 미성숙한 자세
     내 속에 개념어 트라우마 같은 게 있나 봐. 그러니까, 개념어를 사용하면서 말하는 게 점점 꺼려져. 이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만 들여다보고 동시에 멀어지고 싶은 감정이야.

정말 잘 지내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가는 게 이해가 안 되니까 이유를 하나 만든 게 그거야. 하나를 피하려다 송곳 하날 바닥에 더 세워둔 격이지. 알아. 진짜 이유가 있다면 정확히 이거인 건 아니라는 걸. 그렇지만 그게 너무 슬플 거니까 덜 아픈 이걸로 말을 만든 거야. 아, 정말 잘 지내고 싶었는데. 내 잘못이지. 사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가끔 목이 따가워지거든.

사랑이 뭘까? 다시 원점.

모르는 상태에 빠져있는 걸 즐기나 의심했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건 아냐. 정말 모르겠는 거야. 정말로 내가 모르더라고. 일반적인 사랑개념을 말하는 건 아니야. 내가 느끼는 사랑만 얘기하는 거야. 남의 것들은 굳이 고민하지 않으니까, 나는 나니까 내 것만 골몰하는 건데, 아 정말 모르겠어.
동경을 뺀 좋아함이 나한테 가능할까?
부러워하고 탐이 나고 너무 예쁜 걸 빼면 무엇을 사랑이라 느껴야 하는 거야?
난 다시 모르게 됐어. 모르는구나 나는 정말로!

어려운 말을 넣는 건 즐거운데,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그것들을 가지고 놀기가 벅차. 쉽고 순간적인 나의 현상을 빠르게 뱉어내지 못할 때가 점점 생겨나. 그러면서 어떤 방향을 찾고 나아가게 되겠지만, 지금은 부족하다고 느껴서 더 뭘 하게 돼. 그렇게 되면 난 또 너무 예쁜 누군가와 통하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될까? 너무 두려워. 정말 두려워. 제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개념어가 원망스러워.

사실은 나 그 자체가 원망스러운 거겠지만. 항상 한 겹은 덮어두자. 그래야 난 날 지켜내기 시작할 테니까. 합리화라고 해도, 나는 나니까. 내 두개골 감싸는 개념어들 안에 내 머리통이 있는 것처럼 내 몸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어려운 말은 쉽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개념어를 생성한다는 것은 곧 개념을 타자화하는 것이며, 결국 그렇게 개념은 나의 밖에서 존재한다.

이것은 틀렸다. 내가 개념이다.

개념은 글자가 아닌 숨소리로 내 안에 살아있다. 눈빛으로, 눈물방울로, 입 모양으로, 눈썹으로 내재한다. 침묵 이후에는 내가 보인다. 그렇게 다른 이로 묘사되는 나에 관한 말은 힘을 잃기 시작하고 육화된 영혼이 모습을 드러낸다.


Juana Molina - Cara De Espejo

후아나 몰리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다가 이런 진실을 발견한다.

(I-no sé-nocente, no sabía)
(난 몰랐어요)
Cuando uno sabe que va a verse en un espejo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알게 되면
(Que en la cara el alma se veía)
(얼굴에서 영혼을 볼 수 있었어요)
Pone la cara que espera ver en el reflejo
반사된 모습에서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요

필자는 여기에 두 가지의 충돌이 있다고 해석한다. 기대하는 모습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과 동시에 그것을 그대로 응시하며 그 욕망 자체를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이 가사 속에 등장하는 한 몸 안에 혼재한다. 일관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모순은 거짓된 자아상을 담지하겠지만, 이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모든 진실을 살려둘 수 있다.


<Clouds of Sils Maria (2014)>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상충하는 진실들을 긍정하는 길로 나아가는 마리아(줄리엣 비노쉬 분)의 서사를 잘 보여준다. 극 중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는 젊은 시그리드가 중년의 헬레나를 자살하게 만드는 유혹적이고 묘한 관계를 보여주는데, 마리아는 젊은 시절, 이 연극에 시그리드로 출연하며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모두가 그렇듯 마리아도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시그리드 역을 동경하며 헬레나 역할을 제의받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연기 연습 중에도 헬레나를 비난한다. 하지만, 시그리드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헬레나가 될 수 있다. 젊음을 선망하는 욕망이 좌절되는 것은 곧 무관심과 죽음으로 서서히 내몰린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관한 영화 속의 연극이자, 영화 그 자체이다. * 분량상 죽음에 관한 내용은 제외하였다. 궁금하다면 바로 감상해 보길 추천한다.


Kazu - Come Behind Me, So Good!

필자의 불멸의 최애, 카즈 마키노는 Blonde Redhead로 데뷔한 지 26년 만에 솔로 앨범 <Adult Baby>를  발매했다. 밴드 사운드가 없어지고, <Adult Baby>의 아홉 가지 트랙은 그녀의 숨소리, 날리는 비명, 부드러운 쇳소리와 암호 같은 가사, 그리고 조용한 불규칙의 소음, 따뜻한 질감의 반복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엔 故 류이치 사카모토의 기여가 있었는데, 이것은 비밀스럽게 드러난다.

Let the sound of our hearts come alive. 
우리 마음의 소리가 살아나게 해줘.
Half of me, all of me still understand
내 절반, 내 모두는 여전히 이해해.
You just don't explain.
넌 그냥 설명하지 말아.
Come behind me, so good!
내 뒤로 와, 너무 좋아!

가사를 천천히 음미하며 온전히 감각해보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하고 동시에 벅차올라 터질 것 같은 감정이 나(I)의 안으로 들어온다. 그럴 땐 그냥 설명하지 않는 거다. 그래서 너무 좋은 것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남겨두면 된다. 카즈는 그 무언의 상태로 당신을 초대하고 있다. 


"I do feel quite abstract most of the time. Too abstract. And I don’t have concrete sensation of being fully connected to the world of being alive or I don’t really feel like my mind is together with my body or something like this. So, when I’m writing I suppose I never think about anything I’m convinced but everything by myself of being alive. I don’t think about is this important or … this unquestionable feeling of being…existing."

그녀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필자는 그녀의 기민함에 탄식하며, 동시에  그 섬세함을 사랑한다. 그녀의 소리를 들을 때면, 차가운 공기에 둘러싸인 직사광선이 깊이 우물진 마음에 내리쬐는 장면이 떠오른다. 카즈는 교토 출생으로, 클래식 광팬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음악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녀는 어린 시절 프랑스, 영국 음악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변화를 좇아 90년대에 뉴욕으로 이주하였고, 거기에서 우연히 시모네와 아마데오 페이스 쌍둥이 형제를 만나게 된다. 그날로부터 31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많은 사건을 끌어안고 Blonde Redhead로 여전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