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아메리카!
WEBZINE
WEDITOR 김민준
1)
겨울방학과 동시에 대규모 엔저 이벤트 시즌을 맞이하며 냉큼 도쿄로 여행을 떠났다. D와 나는 9일간의 일정 중 꽤 많은 포션을 도쿄의 ‘되는’ 옷들, 그러니까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부터 알렉산드르 마나미스(Aleksandr Manamis), 느와 케이 니노미야(Noir Kei Ninomiya),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의 아카이브까지를 망라하는 도쿄의 ‘진짜 되는’ 옷들을 온종일 탐욕적으로 둘러보는 데 할애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당고와 카페 라테를 입에 물고 도쿄 구석구석을 쏘다니던 어느 오후, 시부야의 전설적인 빈티지 숍 베르베르진(Berberjin)에 동행한 D는 뜬금없이 내게 어떠한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그녀가 마주한 것은 베르베르진의 지하층에 자리 잡은,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은 족히 넘은 리바이스Levi’s의 데님 팬츠들, 그리고 거기에 걸려있는 수백-또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표들이었다.
2)
옷이 ‘패션’으로서 시장에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의 사용 가치에 더해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 필요하다. 일전에 너드의 웹진에 기고했던 패션 포토그래피에 관한 글에서 언급했듯 유구한 전통의 패션 하우스들이 재능 있는 포토그래퍼들을 포섭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나, 유니클로가 뽀빠이(Popeye) 매거진의 전 편집장 타카히로 키노시타를 영입해 라이프웨어 매거진 발행에 힘을 쏟고 있는 일도 분명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특히 패션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떠한 ‘절대적 미감’을 찾는다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형성되는 분야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패션이 단순한 ‘옷’이 아닌 ‘패션’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필연적으로 하나의 ‘판타지’의 생산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또 문외한의 시각이라는 약점을 차치해 두고서라도, ‘그저 오래되었을 뿐인’, ‘내 옷장의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데님 팬츠가 수백, 수천만 원 단위의 가격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기이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현상임에 틀림없으며 이는 단순한 사회적 합의를 넘어서 일종의 종교적 믿음을 통해 사후적으로 탄생한 상품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 또는 종교적 믿음을 이끌어낸 요인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대체 베르베르진의 지하에 걸려 있는 오래된 리바이스의 데님 팬츠에 수백-수천을 호가하는 가격표가 붙는 근거는 어디에 기반하는 것인가?
3)
이쪽 분야에 흥미를 가져 온 이들은 익히 알겠지만, 데님 팬츠란 본래 노동자들의 의복으로서 패션사에 출현했다. 초창기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개발되어 사용되어 오던 소재가 편하고 튼튼한 소재의 특성에 의해 19세기 개척 시대 미국의 광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 의해 큰 호응을 받으며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증대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리바이스나 리(Lee), 그리고 랭글러(Wrangler)가 모두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이와같이 일상품에 다름없던 물건이 힙스터나 마니아들에게 주목받고 ‘콜렉팅’의 영역에 포섭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역사적 스토리가 부여되며 상품의 감각적인 측면을 넘어 초감각적인 측면에서까지 소비자에게 어필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전술했듯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한 허구적 이미지의 생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20세기의 하반기에 접어든 일본의 경우에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이하고 일본에 물 밀듯 들어온 미국의 (맥아더로 대표되는) 마초이즘적 이미지였을 것이며, 실제로 미국 군함에 스스로를 폭탄 삼아 꽂아 넣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던 일본의 젊은이들은 1945년 여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미국의 문화를 재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세계 문화의 미국화란 동유럽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현상이었지만, 일본의 경우는 더욱 드라마틱한 전환을 이루어 낸 특이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4)
잠시 데님을 옆으로 제쳐 두고 ‘아메리카’가 일본에 흘러들어오던 시기에 대해 더 상세히 얘기해 볼 필요성이 있겠다. 아메리칸 클래식 패션계에서 하나의 정전(canon)이 되어버린 『TAKE IVY』는 이시즈 쇼스케와 구로스 도시유키를 위시한 당대의 일본인 청년들이 ‘진짜 미국’의 스타일을 찾아보겠다며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 발간한 포토북이자 영상물이었다.
일본에서 미국의 잡지를 돌려 읽으며 나름의 선구자적인 ‘아이비(Ivy)’ 패션을 선도하던 소규모 공동체였던 이들은 『멘즈 클럽』 등의 남성 패션지에 글을 기고하며 일본에 아메리카를 소개하는 역할을 도맡아 왔지만, 정작 한 번도 실제로 미국 땅을 밟아본 적은 없는 이들이었다. 마침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은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허용했고, 이 기회에 그들은 “진짜로 아이비리그에 가서 학생들을 찍어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고 결심한 후 이를 당차게 실천으로 옮겼지만, 당연하게도 ‘진짜 미국’이라는 것은 그곳에 없었다. 막상 미국에, 그것도 아이비리그의 중심인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에 도착한 일본인 청년들은 급속도로 일종의 절망 상태에 빠져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구로스는 붉은 벽돌로 된 조지 왕조풍의 위엄이 넘치는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바로 이거다, 내가 여기에 왔다!’…(중략)…이제 그는 학생들이 3버튼 재킷과 아이비 스트랩 팬츠, 흰색 옥스포드 버튼 다운 칼라 셔츠, 레지멘탈 타이와 윙팁 구두를 신고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첫 번째 학생 무리들이 긴바지를 잘라낸 닳고 닳은 반바지와 썩어가는 플립플롭을 신고 기숙사를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무더운 여름날 아침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인 청년들이 잡지를 통해 접하며 환상을 가져왔던 ‘아이비’란 이미 미국인들의 일상과는 어느 정도 유리되어 있는, 말 그대로 미국에서도 잡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착장에 가까웠으며, 더욱이 그것은 애초부터 상류층의 소수에게만 허락된 옷차림이었다. 즉 모두가 일상적으로 ‘3버튼 재킷과 아이비 스트랩 팬츠, 흰색 옥스포드 버튼 다운 칼라 셔츠’ 따위를 입고 생활하는 세계는 미국 땅 어디에도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메리칸 클래식이라는 명칭이라거나 ‘진짜 미국’이라는 이미지는 오히려 외부인들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허구의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마치 19세기 서구인들에게 내적인 풍경으로서 존재하던 ‘오리엔탈’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허망함에 빠진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일본으로 돌아가 ‘진짜 미국’이란 어디에도 없음을 모두에게 알리고 기모노를 입으며 하하호호 사케 잔을 기울였는가… 하면 당연히 그럴 리는 없고,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진짜 미국’이라는 상을 다시금 구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즉 미국에조차 ‘진짜 미국’이라는 이데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미국’의 미학을 일본에서 구축하고 구현해 보자는 일종의 전도를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운동이 일본에서 일찍이, 트럼프나 레이건보다도 선제적으로 주창되고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하지 않은가.)
겨울방학과 동시에 대규모 엔저 이벤트 시즌을 맞이하며 냉큼 도쿄로 여행을 떠났다. D와 나는 9일간의 일정 중 꽤 많은 포션을 도쿄의 ‘되는’ 옷들, 그러니까 캐롤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부터 알렉산드르 마나미스(Aleksandr Manamis), 느와 케이 니노미야(Noir Kei Ninomiya),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의 아카이브까지를 망라하는 도쿄의 ‘진짜 되는’ 옷들을 온종일 탐욕적으로 둘러보는 데 할애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당고와 카페 라테를 입에 물고 도쿄 구석구석을 쏘다니던 어느 오후, 시부야의 전설적인 빈티지 숍 베르베르진(Berberjin)에 동행한 D는 뜬금없이 내게 어떠한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그녀가 마주한 것은 베르베르진의 지하층에 자리 잡은,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은 족히 넘은 리바이스Levi’s의 데님 팬츠들, 그리고 거기에 걸려있는 수백-또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표들이었다.
2)
옷이 ‘패션’으로서 시장에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의 사용 가치에 더해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 필요하다. 일전에 너드의 웹진에 기고했던 패션 포토그래피에 관한 글에서 언급했듯 유구한 전통의 패션 하우스들이 재능 있는 포토그래퍼들을 포섭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나, 유니클로가 뽀빠이(Popeye) 매거진의 전 편집장 타카히로 키노시타를 영입해 라이프웨어 매거진 발행에 힘을 쏟고 있는 일도 분명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특히 패션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떠한 ‘절대적 미감’을 찾는다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형성되는 분야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패션이 단순한 ‘옷’이 아닌 ‘패션’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필연적으로 하나의 ‘판타지’의 생산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또 문외한의 시각이라는 약점을 차치해 두고서라도, ‘그저 오래되었을 뿐인’, ‘내 옷장의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데님 팬츠가 수백, 수천만 원 단위의 가격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기이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현상임에 틀림없으며 이는 단순한 사회적 합의를 넘어서 일종의 종교적 믿음을 통해 사후적으로 탄생한 상품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합의, 또는 종교적 믿음을 이끌어낸 요인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대체 베르베르진의 지하에 걸려 있는 오래된 리바이스의 데님 팬츠에 수백-수천을 호가하는 가격표가 붙는 근거는 어디에 기반하는 것인가?
3)
이쪽 분야에 흥미를 가져 온 이들은 익히 알겠지만, 데님 팬츠란 본래 노동자들의 의복으로서 패션사에 출현했다. 초창기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개발되어 사용되어 오던 소재가 편하고 튼튼한 소재의 특성에 의해 19세기 개척 시대 미국의 광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 의해 큰 호응을 받으며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증대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리바이스나 리(Lee), 그리고 랭글러(Wrangler)가 모두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이와같이 일상품에 다름없던 물건이 힙스터나 마니아들에게 주목받고 ‘콜렉팅’의 영역에 포섭되기 위해서는 그것에 역사적 스토리가 부여되며 상품의 감각적인 측면을 넘어 초감각적인 측면에서까지 소비자에게 어필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전술했듯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한 허구적 이미지의 생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20세기의 하반기에 접어든 일본의 경우에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이하고 일본에 물 밀듯 들어온 미국의 (맥아더로 대표되는) 마초이즘적 이미지였을 것이며, 실제로 미국 군함에 스스로를 폭탄 삼아 꽂아 넣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던 일본의 젊은이들은 1945년 여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미국의 문화를 재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세계 문화의 미국화란 동유럽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현상이었지만, 일본의 경우는 더욱 드라마틱한 전환을 이루어 낸 특이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4)
잠시 데님을 옆으로 제쳐 두고 ‘아메리카’가 일본에 흘러들어오던 시기에 대해 더 상세히 얘기해 볼 필요성이 있겠다. 아메리칸 클래식 패션계에서 하나의 정전(canon)이 되어버린 『TAKE IVY』는 이시즈 쇼스케와 구로스 도시유키를 위시한 당대의 일본인 청년들이 ‘진짜 미국’의 스타일을 찾아보겠다며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 발간한 포토북이자 영상물이었다.
일본에서 미국의 잡지를 돌려 읽으며 나름의 선구자적인 ‘아이비(Ivy)’ 패션을 선도하던 소규모 공동체였던 이들은 『멘즈 클럽』 등의 남성 패션지에 글을 기고하며 일본에 아메리카를 소개하는 역할을 도맡아 왔지만, 정작 한 번도 실제로 미국 땅을 밟아본 적은 없는 이들이었다. 마침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은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허용했고, 이 기회에 그들은 “진짜로 아이비리그에 가서 학생들을 찍어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고 결심한 후 이를 당차게 실천으로 옮겼지만, 당연하게도 ‘진짜 미국’이라는 것은 그곳에 없었다. 막상 미국에, 그것도 아이비리그의 중심인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에 도착한 일본인 청년들은 급속도로 일종의 절망 상태에 빠져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구로스는 붉은 벽돌로 된 조지 왕조풍의 위엄이 넘치는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바로 이거다, 내가 여기에 왔다!’…(중략)…이제 그는 학생들이 3버튼 재킷과 아이비 스트랩 팬츠, 흰색 옥스포드 버튼 다운 칼라 셔츠, 레지멘탈 타이와 윙팁 구두를 신고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첫 번째 학생 무리들이 긴바지를 잘라낸 닳고 닳은 반바지와 썩어가는 플립플롭을 신고 기숙사를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무더운 여름날 아침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인 청년들이 잡지를 통해 접하며 환상을 가져왔던 ‘아이비’란 이미 미국인들의 일상과는 어느 정도 유리되어 있는, 말 그대로 미국에서도 잡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착장에 가까웠으며, 더욱이 그것은 애초부터 상류층의 소수에게만 허락된 옷차림이었다. 즉 모두가 일상적으로 ‘3버튼 재킷과 아이비 스트랩 팬츠, 흰색 옥스포드 버튼 다운 칼라 셔츠’ 따위를 입고 생활하는 세계는 미국 땅 어디에도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메리칸 클래식이라는 명칭이라거나 ‘진짜 미국’이라는 이미지는 오히려 외부인들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허구의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마치 19세기 서구인들에게 내적인 풍경으로서 존재하던 ‘오리엔탈’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허망함에 빠진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일본으로 돌아가 ‘진짜 미국’이란 어디에도 없음을 모두에게 알리고 기모노를 입으며 하하호호 사케 잔을 기울였는가… 하면 당연히 그럴 리는 없고,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진짜 미국’이라는 상을 다시금 구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즉 미국에조차 ‘진짜 미국’이라는 이데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미국’의 미학을 일본에서 구축하고 구현해 보자는 일종의 전도를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운동이 일본에서 일찍이, 트럼프나 레이건보다도 선제적으로 주창되고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하지 않은가.)
다행히 그들은 ‘부랑자같이 엉망인’ 채로 등교하는 대부분의 하버드 학생들 대신 교회에 다녀오는 행렬 가운데서 마드라스 블레이저에 카키색 팬츠를 입고 있는 몇몇 이들을 발견해 내거나 대학 스포츠 팀의 사진 등을 건져낼 수 있었고, 일본으로 귀국한 이들은 찍어온 사진들을 바탕으로 간신히 일본의 『멘즈 클럽』 독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안심하십시오! 미국인들은 모두 우리의 상상과 동일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업성 면에서나 영향력 면에서나 큰 성공을 거둔 『TAKE IVY』는 60년대 일본 사회에 ‘아메리카’라는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이를 단순한 서브컬쳐에서 하나의 메인스트림 트렌드로 진입하도록 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 주요한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진짜 미국’을 단순히 ‘상류층 가정의 백인&아이비리거’와 개념적으로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음흉한 의도가 카메라 뒤에 숨어있었다는 점도 『TAKE IVY』를 논하며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의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아메리카’ 유행은 시작부터 말 그대로 ‘허구’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를 생성했다거나, 그 ‘허구’를 젊은이들이 (무지몽매하게) 받아들이고 열광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를 비판하고자 하려는 의도는 없다. 마르크스가 종교에 관해 논했던 것처럼, 영향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정신 상태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영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일본에는 대일본제국이라는 자아를 완전히 거세당해 버리고 일본 열도의 작은 섬나라로 다시금 지리적 영토가 축소되어 버린, 동시에 심리적 영토는 아직 대일본제국의 시절에 머물러 있었던 그 젊은이들의 비대해진 리비도를 담아낼 그릇이 어디엔가는 필요했고, 그것이 전후 일본을 점령하러 들어온 미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구조가 이미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탈식민주의 비평가 호미 바바가 말했듯 식민지의 피지배자(일본)는 제국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상상된 진정한 지배자(미국)의 상을 계속해서 흉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당시의 일본에게 아메리칸 클래식과 『TAKE IVY』는 ‘없다면 발명이라도 되었어야 하는 무언가’였던 것이다.
5)
그런가 하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918년의 저작 <신들의 미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힘은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변조하는 힘이다.”
“이 땅에 온 것들은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심하세요, 조심하세요…”
일본은 예로부터 마땅한 국교(國敎)가 없는 나라였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신토(神道)’라는 이름으로 칭한 느슨한 형태의 종교가 오랜 세월 일본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긴 했지만, 그것은 기반이 될만한 성서나 교리 체계를 갖추지 못한 원시적 종교에 가까웠기에 일정한 정통성을 가진 종교가 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일본은 고금을 막론하고 불교, 가톨릭,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 등 잡다한 형태의 사상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곳에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본에 수입된 사상들은 하나같이 ‘온전’치 못했다. 각 종교의 유일신은 신토에 포섭당해 그 유일성을 잃어버렸고,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변변한 혁명 한 번 이뤄보지 못하고 정치적 탄압에 의해 손쉽게 전향해 버렸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듯,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예로부터 무엇이든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고, 바깥에서 온 것이 정착한다면 그때는 오직 그것들이 ‘변조되었을’ 때뿐이었다. 일본에게는 외부에 대항할 ‘자기’가 없었기에 외부 사상의 수용이 쉬웠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사상들이 일본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전부 ’신토’의 일부분으로 전락하고 쉽게 ‘일본화’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산 옷더미들은 어떠한 ‘일본화’ 과정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롤랑 바르트는 일본을 ‘기호의 제국’이라 불렀고, 사이먼 레이놀즈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을 ‘레트로 제국’이라 불렀다. 패션이나 음악 등의 문화를 좋아해 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일본인들이 흘러간 시대의 아카이브를 얼마나 철저하게, 편집증적으로 관리하는 이들인지 익히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자신이 겪은 90년대의 음반 콜렉팅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일본에서는 역사상 모든 음반이 유통 중인 것 같았다. 지구상 어느 나라도, 아무리 짜증나리만치 꼼꼼한 영국이라도 서구 대중음악과 준대중음악, 나아가 순전한 비대중음악을 그처럼 철저하게 관리하지는 못했다…”
일본으로 건너온 리바이스 데님 팬츠 또한 노동자의 옷이라는 정체성을 탈구당하고, 또는 젊은이의 표상이라는 본토에서의 상징성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로 일본인들 특유의 ‘체계’ 안에 필연적으로 포섭되었다. 예컨대 『MADE IN USA』같은 책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책의 주 저자인 고바야시 야스히코는 일본에 이식된 미국의 물질주의를 타파하고 기능성에 집중한 미국의 아웃도어 라이프를 소개하는 데 이 카탈로그북의 목적을 둔 반면 당대 일본의 청년들은 더욱 철저히 미국을 모방(mimicry)하기 위한 상세한 카탈로그북을 필요로 했고, 되려 본래의 목적의식과는 반대로 공급과 수요가 적절히 맞아떨어진 상황에서 출간된 『MADE IN USA』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옷의 ‘스펙’, 즉 의복의 기술적 사양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직후 이어진 뽀빠이 매거진의 창간과 함께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물질적 소유와 디테일에 대한 강박(싱글 스티치, 14oz 데님, 노란색 실, big E, 로트번호…)을 통해 패션을 향유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마당에, 『TAKE IVY』의 저자들의 뒷배경에 미국 CIA의 사주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이 나돌았던 것은 크게 이상하지도 않다.
이후 현재에까지 이르는 데님에 대한 디테일적 강박과 그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시작하기엔 이미 글이 꽤 길어졌고, 거기까지 서술할 체력적(시간적) 여유가 지금의 내게는 없다.
궁금하다면
https://www.j-e-a-n-s.net/items/00799.html
https://www.heddels.com/fades/
등을 둘러보기만 해도 현재의 데님 시장이 얼마나 ‘도착적’으로 돌아가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외국어라 읽기 어렵다면 디시인사이드 데님 갤러리만 가 보아도 좋고…
여하튼, 외래 문물이나 사상을 탈맥락화하고 그것을 해체-재구축하는 능력은 앞서 언급했듯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잘 해오던 능력이었다. 본래의 사용 가치나 기능적 특질 등을 맥락으로부터 떨어트리고 나서야 창출된 ‘힙스터 희소 경제’는 이제 리바이스 뿐만 아니라 각국의 군복, 노동자 의복 등을 아우르는, 꽤나 넓은 시장을 점유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이 많은 경우 현대 의복(특히 남성복)의 근간을 이루는 ‘원형’이라는 점에서도 시장 가치를 갖겠다만, 그것은 기존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카테고리에서 다시금 파악되었기에 비로소 발견된 가치에 다름 아니다.
6)
이 현상이 마치 최근 수년간 ‘시티팝’이라는 느슨한 이름으로 묶이고 있는 70~90년대 일본의 가요들에 빗대어 설명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말미에 스쳤다. 시티팝이라는 애매모호한 사조 또한 수십 년 전에 발매되어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던 레코드 혹은 음원들이 2010년대 후반 유튜브에 ‘요란하고도 멜랑콜릭한, 동시에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2D 작화의 야간 드라이빙’ 이미지와 함께 다시금 발굴되어 조명의 안쪽으로 복귀한 현상을 뜻한다. 당연히 20세기 후반 당시에는 그 어디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던 장르이지만 수십 년 후를 살고 있는 인터넷 기반의 힙스터와 아키비스트들은 그것들을 긁어모아 특유의 노스탤직한 이미지의 끝없는 재생산과 함께 ‘시티팝 에스테틱’을 구축했고, 일종의 ‘소급 가공 장르’로 굳어진 현재의 시티팝은 많은 숏폼 콘텐츠의 배경음악이자 동시대 팝 트랙의 주요한 레퍼런스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는 2024년 현재의 레코드, 특히 바이닐 소비 트렌드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며 실제로 엄청난 돈을 세계 각지에서 쓸어모으고 있는 중이다. 재발매(Reissue) 음반 뿐만아닌 발매 당시의 오리지널 음반은 중고 시장에서 끔찍하게도 높은 거래 가격을 형성하고 있고, 그것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낭만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리키는 상징적 대상으로 가열차게 소비되고 있는데, 아무도 이 음반들이 누구에 의해서, 대체 왜 다시금 이 자리에 이러한 형태로 돌아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본원적인 의문을 품고 있지 않은 모양새다.
7)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게 켜켜이 쌓여 온 일련의 과정을 통해 베르베르진 지하층의 수천만 원짜리 리바이스 한 벌이 나와 함께 여행을떠난 D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에게 어떠한 어지럼증을 유발하게 된 것이지 않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천만 원을 주고 리바이스 한 벌을 사든 말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2024년의 우리에게 ‘아름답다’고 인식하도록 작용하게 되었는지, 그 ‘망각된 기원’을 찾아 파헤쳐 보는 일은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분명한 효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진짜 미국’을 단순히 ‘상류층 가정의 백인&아이비리거’와 개념적으로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음흉한 의도가 카메라 뒤에 숨어있었다는 점도 『TAKE IVY』를 논하며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의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아메리카’ 유행은 시작부터 말 그대로 ‘허구’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를 생성했다거나, 그 ‘허구’를 젊은이들이 (무지몽매하게) 받아들이고 열광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를 비판하고자 하려는 의도는 없다. 마르크스가 종교에 관해 논했던 것처럼, 영향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정신 상태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영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일본에는 대일본제국이라는 자아를 완전히 거세당해 버리고 일본 열도의 작은 섬나라로 다시금 지리적 영토가 축소되어 버린, 동시에 심리적 영토는 아직 대일본제국의 시절에 머물러 있었던 그 젊은이들의 비대해진 리비도를 담아낼 그릇이 어디엔가는 필요했고, 그것이 전후 일본을 점령하러 들어온 미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구조가 이미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탈식민주의 비평가 호미 바바가 말했듯 식민지의 피지배자(일본)는 제국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상상된 진정한 지배자(미국)의 상을 계속해서 흉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당시의 일본에게 아메리칸 클래식과 『TAKE IVY』는 ‘없다면 발명이라도 되었어야 하는 무언가’였던 것이다.
5)
그런가 하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918년의 저작 <신들의 미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힘은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변조하는 힘이다.”
“이 땅에 온 것들은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심하세요, 조심하세요…”
일본은 예로부터 마땅한 국교(國敎)가 없는 나라였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신토(神道)’라는 이름으로 칭한 느슨한 형태의 종교가 오랜 세월 일본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긴 했지만, 그것은 기반이 될만한 성서나 교리 체계를 갖추지 못한 원시적 종교에 가까웠기에 일정한 정통성을 가진 종교가 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일본은 고금을 막론하고 불교, 가톨릭,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 등 잡다한 형태의 사상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곳에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본에 수입된 사상들은 하나같이 ‘온전’치 못했다. 각 종교의 유일신은 신토에 포섭당해 그 유일성을 잃어버렸고,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변변한 혁명 한 번 이뤄보지 못하고 정치적 탄압에 의해 손쉽게 전향해 버렸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듯,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본은 예로부터 무엇이든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고, 바깥에서 온 것이 정착한다면 그때는 오직 그것들이 ‘변조되었을’ 때뿐이었다. 일본에게는 외부에 대항할 ‘자기’가 없었기에 외부 사상의 수용이 쉬웠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사상들이 일본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전부 ’신토’의 일부분으로 전락하고 쉽게 ‘일본화’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산 옷더미들은 어떠한 ‘일본화’ 과정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롤랑 바르트는 일본을 ‘기호의 제국’이라 불렀고, 사이먼 레이놀즈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을 ‘레트로 제국’이라 불렀다. 패션이나 음악 등의 문화를 좋아해 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일본인들이 흘러간 시대의 아카이브를 얼마나 철저하게, 편집증적으로 관리하는 이들인지 익히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자신이 겪은 90년대의 음반 콜렉팅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일본에서는 역사상 모든 음반이 유통 중인 것 같았다. 지구상 어느 나라도, 아무리 짜증나리만치 꼼꼼한 영국이라도 서구 대중음악과 준대중음악, 나아가 순전한 비대중음악을 그처럼 철저하게 관리하지는 못했다…”
일본으로 건너온 리바이스 데님 팬츠 또한 노동자의 옷이라는 정체성을 탈구당하고, 또는 젊은이의 표상이라는 본토에서의 상징성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로 일본인들 특유의 ‘체계’ 안에 필연적으로 포섭되었다. 예컨대 『MADE IN USA』같은 책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책의 주 저자인 고바야시 야스히코는 일본에 이식된 미국의 물질주의를 타파하고 기능성에 집중한 미국의 아웃도어 라이프를 소개하는 데 이 카탈로그북의 목적을 둔 반면 당대 일본의 청년들은 더욱 철저히 미국을 모방(mimicry)하기 위한 상세한 카탈로그북을 필요로 했고, 되려 본래의 목적의식과는 반대로 공급과 수요가 적절히 맞아떨어진 상황에서 출간된 『MADE IN USA』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옷의 ‘스펙’, 즉 의복의 기술적 사양에 대한 집착과 강박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직후 이어진 뽀빠이 매거진의 창간과 함께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물질적 소유와 디테일에 대한 강박(싱글 스티치, 14oz 데님, 노란색 실, big E, 로트번호…)을 통해 패션을 향유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마당에, 『TAKE IVY』의 저자들의 뒷배경에 미국 CIA의 사주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이 나돌았던 것은 크게 이상하지도 않다.
이후 현재에까지 이르는 데님에 대한 디테일적 강박과 그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시작하기엔 이미 글이 꽤 길어졌고, 거기까지 서술할 체력적(시간적) 여유가 지금의 내게는 없다.
궁금하다면
https://www.j-e-a-n-s.net/items/00799.html
https://www.heddels.com/fades/
등을 둘러보기만 해도 현재의 데님 시장이 얼마나 ‘도착적’으로 돌아가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외국어라 읽기 어렵다면 디시인사이드 데님 갤러리만 가 보아도 좋고…
여하튼, 외래 문물이나 사상을 탈맥락화하고 그것을 해체-재구축하는 능력은 앞서 언급했듯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잘 해오던 능력이었다. 본래의 사용 가치나 기능적 특질 등을 맥락으로부터 떨어트리고 나서야 창출된 ‘힙스터 희소 경제’는 이제 리바이스 뿐만 아니라 각국의 군복, 노동자 의복 등을 아우르는, 꽤나 넓은 시장을 점유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들이 많은 경우 현대 의복(특히 남성복)의 근간을 이루는 ‘원형’이라는 점에서도 시장 가치를 갖겠다만, 그것은 기존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카테고리에서 다시금 파악되었기에 비로소 발견된 가치에 다름 아니다.
6)
이 현상이 마치 최근 수년간 ‘시티팝’이라는 느슨한 이름으로 묶이고 있는 70~90년대 일본의 가요들에 빗대어 설명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말미에 스쳤다. 시티팝이라는 애매모호한 사조 또한 수십 년 전에 발매되어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던 레코드 혹은 음원들이 2010년대 후반 유튜브에 ‘요란하고도 멜랑콜릭한, 동시에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2D 작화의 야간 드라이빙’ 이미지와 함께 다시금 발굴되어 조명의 안쪽으로 복귀한 현상을 뜻한다. 당연히 20세기 후반 당시에는 그 어디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던 장르이지만 수십 년 후를 살고 있는 인터넷 기반의 힙스터와 아키비스트들은 그것들을 긁어모아 특유의 노스탤직한 이미지의 끝없는 재생산과 함께 ‘시티팝 에스테틱’을 구축했고, 일종의 ‘소급 가공 장르’로 굳어진 현재의 시티팝은 많은 숏폼 콘텐츠의 배경음악이자 동시대 팝 트랙의 주요한 레퍼런스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는 2024년 현재의 레코드, 특히 바이닐 소비 트렌드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며 실제로 엄청난 돈을 세계 각지에서 쓸어모으고 있는 중이다. 재발매(Reissue) 음반 뿐만아닌 발매 당시의 오리지널 음반은 중고 시장에서 끔찍하게도 높은 거래 가격을 형성하고 있고, 그것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낭만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리키는 상징적 대상으로 가열차게 소비되고 있는데, 아무도 이 음반들이 누구에 의해서, 대체 왜 다시금 이 자리에 이러한 형태로 돌아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본원적인 의문을 품고 있지 않은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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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결론은… 이렇게 켜켜이 쌓여 온 일련의 과정을 통해 베르베르진 지하층의 수천만 원짜리 리바이스 한 벌이 나와 함께 여행을떠난 D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에게 어떠한 어지럼증을 유발하게 된 것이지 않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천만 원을 주고 리바이스 한 벌을 사든 말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2024년의 우리에게 ‘아름답다’고 인식하도록 작용하게 되었는지, 그 ‘망각된 기원’을 찾아 파헤쳐 보는 일은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분명한 효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